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추억'이란 것이 참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한 살이라도 어리고, 힘이 남아 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하는 편이다. 스펙을 위해서, 잘 나가기 위해서, 취업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억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이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많은 듯하고, 추억이 많을수록 지금의 힘든 시간을 버티기가 조금은 수월해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까미노를 걸은 경험은 내가 거의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는 내 평생에 가장 소중한 추억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실 2주 이상도 휴가를 내기가 어려운 것이 한국의 현실 아닌가? 엄청 잘 나가는 연예인이 아닌 이상 말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해외에 나가도 이메일과 전화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회사원은 심한 경우 일주일도 휴가를 낼 수가 없으며, 자영업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휴가를 나가는 게 힘들다. 연예인들 중에서도 사실 예능을 하는 경우에는 휴가를 마음대로 낼 수 없고, 잘 나가지 않는 연예인들은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길게 어딘가를 가는 결정이 쉽지 않다.
그런데 까미노를 완주하려면 최소 1개월 또는 그 이상의 공백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까미노 블루를 경험하는 이유는 어쩌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온전히 걷고, 먹고, 자기만 하는 삶을 한 달 동안 갖기가 힘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백수로 지내는 경우에는 타의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백수로 지낸다 해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을 위해 원서를 쓰는 등 현실과 밀접한 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까미노에서는 이와 달리 최소 1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다른 건 고민할 게 없다. 그 정도 기간을 비워놔야 완주를 할 수 있으니까. 현대사회에서 현실에서 그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정말 흔히 오지 않는다. 까미노를 다녀온 순례자들이 까미노를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 그 자유로움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자유를 맛보고 나면 현실에 어떻게 돌아오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까미노에서의 경험은 내게 그런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난 힘들 때면 그때의 자유로움을 떠올리고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 내가 넘었던 산과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 10-20분만 빠져 있다 보면 다시 살 힘을 충전받는다. 그건 아마 그 시간을 추억하는 과정에서 내가 그 길을 걸으며 느끼고, 생각하면서 깨달았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까미노를 걷는 과정은 그러한 추억을 선물해 준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가능하면 고민거리가 있을 때 까미노를 떠나는 것을 권하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추억은 치열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이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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