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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3년 봄,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 유랑기_시간

얼마나 걸리나?

'순례길'을 걷는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설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치를 잡아놓은 것일 뿐, 순례길을 걷는 게 걸리는 시간은 딱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시간과 본인의 체력에 따라 까미노를 서로 다른 시간 동안 걷는다. 그리고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프랑스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 아래에 있는 프랑스 마을인 생장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프랑스길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 걸린다'라고 획일적으로 답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장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걷는데 얼마나 걸리냐?'라고 묻는다면 평균적으로 30일 전후가 걸린다는 게 맞는 말이다. 그 질문은 시작점과 거리가 명시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까미노를 걸어보면 알겠지만 그 길을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 역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난 무리하지 않고 적절히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800km를 23일 만에 걸은 독일 아저씨 Stefan도 봤고, 빨리 걷는 게 목적이 되어서 쉬지 않고 걸어서 20일 만에 다 걸은 한국 대학생도 봤으며, 하루 10km 이상은 걷는 게 힘들어서 중간에 버스를 탔는데도 다 걷는데 2달이 걸린 한국 누님도 봤다. 

그래서 사실 '얼마나 걸리느냐?'는 것은 획일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얼마나 '빨리' 걸었느냐는 까미노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이번에 다 걸었냐'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한국 사람들이야 유럽까지 가서 그 길을 걸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몰아서 한 번에 다 걷지, 유럽 사람들 중에서는 몇 년에 걸쳐서 까미노를 구간별로 나눠서 걷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수료증을 받을 수 있는 100km 지점부터 걷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까미노'의 가장 전형적인 길- 2013년 3월

빨리 걷는 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까미노에서는 '얼마나 빨리' 완주를 했는지보다 까미노 위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에 까미노를 빨리 걸은 사람들은 까미노를 그만큼 덜 보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고속철도를 타는 것이, 고속철도를 타는 것보다는 자동차를 타는 것이,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그 길 위의 풍경을 더 자세히, 그리고 많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천천히 걸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800km를 걸었더라도 그 길 위에서 더 많은 것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는 한다. 

그래서 사실 까미노를 빨리 걷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사실은 완주했는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유럽에 살았다면 매년 200km 정도 걸어서 4년에 한 번 정도 까미노 프랑스 길 전체를 걸었을 것이다. 비행기표와 개인적인 시간 때문에 한국에 살면서 까미노를 그렇게 걷는 게 불가능하니 그렇게 걷지 못할 뿐... 실제로 영국에서 거리공연을 하는 한 친구는 '언제까지 걸을 것이냐?'는 질문에 '정하지 않고 그냥 왔는데?'라고 대답하면서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까미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있다. 얼마나 많이 누리고, 나누고, 느끼면서 그 길을 걸을 것인지가 까미노의 핵심이다. 물론, 한국에서 이왕 갔으니 계획하고 간 길을 다 걷는 게 가장 좋긴 할 것이지만 그 계획들도 조금씩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는 갖고 그 길을 걷는 것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나 같은 경우에도 내가 갖고 간 책자가 말한 루트의 대체 루트로 감으로 인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Giorgio는 빨리 걷는게 싫다며 중간에 무리에서 이탈했다. -2013년 3월

시간보다 방향이다

까미노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 방향, 또는 그 길을 '어떻게' 걸을 것인가이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인지, 아니면 까미노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까미노를 걸을 때 느꼈던 가장 큰 안타까움은 내가 까미노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성수기에 걷는 사람들은 그 시간의 차이가 숙소를 잡을 수 있는지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고, 새벽에 일어나서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까미노를 걸었던 3-4월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난 오히려 텅 빈 알베르게에서 몇 번씩이나 혼자 자야 했고, 침대가 없어서 알베르게를 옮겨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완주'에 엄청난 의미를 두고 걷는 경우가 많았고, 하루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20일 만에 800km를 완주한 그 대학생에게 까미노는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건강함을 증명해 내는 수단인 것 같았다. 만약 그게 목표라면 까미노보다는 사막 마라톤과 같은 대회를 참가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까미노를 그런 마음으로 걷는 사람들이 조금만 적어졌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까미노는 '정복' 이상의 것들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난 이 거대한 알베르게에서 혼자 묵었다. 비수기에 까미노에선 서두를 이유가 없다 -201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