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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기도부탁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기도 부탁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일들을 잘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기도부탁을 하거나, 개인적인 일에 대한 얘기를 하면 오는 피드백에 오히려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내 뜻과 의와 세상이 말하는 좋은 것, 세상이 말하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내가 노력하더라도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께 물으면서 내 길을 찾아가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근황을 말하거나 기도부탁을 하면, 합격하게 해주세요,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부탁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 될 수 있게, 합격할 수 있게 기도해줄게 라고 말한다. 거기까지는 선의의 의사표현이니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의 그런 말들이 내 안에 욕구와 욕망을 일으킨다는데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해준다고 하면, 내가 내려놓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일단 그 목표로 최선을 다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것을 손에 쥐고 싶어지고, 그게 나의 우상이 되어서 어느순간, 은근슬쩍 그게 내 안에서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내 자신을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잘 안하게 되었다. 내 기도제목을 내놓은 후에도 그게 또 왜곡되어 받아들여지는게 당혹스러워서...

예를 들면 올해 내 배우자 기도제목에 나는 "내가 좋은 배우자로 준비되고,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함께 더 거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라고 했는데 그건 곧바로 [좋은 배우자 만날 수 있도록]으로 해석되어서 받아들여지더라. 나의 기도제목은 나의 내면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의 내면이 그러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그냥 현상적으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굉장히,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고지론의 영향이 없지 않고, 또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삶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좋은 것, 잘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과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해주며 그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사실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든다. 이는 좋은 결과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낙망하고, 힘들어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과정과 나의 마음을 위해 기도한 사람은 힘들어하는 시간을 잠시 거친 후에 곧바로 일어나 "하나님께서 날 어떤 길로 인도하시려는 것일까?"를 묻고, 고민하고, 살피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좌절과 절망에서 끝나는 반면 후자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을 더 잘 알아가기 때문에 후자의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갈 확률이 훨씬 높다.

어느 순간부터 결과에 대해서 잘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가식을 떠는 것은 아니다. 난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고, 이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나님께 털어놓은 후, 다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알게 해달라고, 그리고 내가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 높게 놓게 하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게 성경적인 기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기도하셨으니까.

개인적으로 궁극적으로는 시상식, 합격, 승진 등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는게 맞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그것만이 감사의 대상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수상하거나, 합격하거나 승진하는 것은 사실 세상의 인정을 받을 것일뿐 그건 하나님 안에서는 지나가는 절차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감사할 것은 사실 수상, 합격, 승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길을 열어주신 것,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인게 맞을 것이다. 어쨌든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길을 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이니까.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끝에 가면 엄청나게 큰 차이를 만든다. 그래서, 내가 하는 계획이나 가는 길을 정말 신뢰하는 사람들, 굳이 그 결과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에게만 말한다. 그저 어울린다, 좋네, 열심히 해봐, 이 정도 코멘트를 해줄 사람들에게만. 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내 믿음이 그렇게 크지는 못해서, 나는 세상적인 성공에 여전히 욕구와 욕망이 작지 않아서, 결과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말에 내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뤄지는 결과는, 하나님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 세상이 말하는 실패가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가 아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에서의 결과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나의 마음과 믿음, 내가 내 자신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핵심이 있다. 기도는, 그것을 위해 해야 한다. 중보는, 그 부분을 위해 해야 한다. 결과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