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목사님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있는 이 말씀을 '그만큼 최대한 사랑하라고 노력하라는 것'으로 설교에서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내가 꽤나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 같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들 중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하는 말씀도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고, 우리가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지금도 유효한 율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게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내가 그게 안된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정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린 원수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
여기에 핵심이 있냐고? 아니다. 난 정말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수는 무엇인가? 원수는 어떤 형태로든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다. 그 피해란 무엇인가? 나 또는 나의 가까운 사람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죽였을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 재산을 강탈했거나 사기를 쳤을 수도 있다.
그렇다. '피해'란 전적으로 이 땅에 속한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이 땅의 것에서 자유롭다면 그런 피해를 입더라도 힘들지 않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 그렇단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힘들거나 그에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한 감정의 정도와 감정이 지속되는 기간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긴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준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나는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상대를 이해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해]란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간다'가 아니라, 상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내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알아가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도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가득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의 인생을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를 추적하면, 그가 어느 정도는 타고난 성향까지 고려하면, 감정적으로는 그게 힘들겠지만 머리로나마 그가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극악한 범죄자들도 그렇다.
그 지점까지 가면 우린 딜레마에 빠진다. 세상은 '그래도 성인인데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악한 사람에게 서사를 주면 안된다'고 말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얘기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런 상처덩이라의 사람들은 다른 피해자를 또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또 그런 사례가 있어야 상처덩어인 또 다른 사람들이 그런 처벌을 받는게 두려워서라도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지 않게 할 수 있으니까.
세상적인, 사회적인 기준으로는 거기까지가 맞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가 받은 상처를 같은 상황에 있었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타고난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상대의 타고난 성향을 파악하고, 그런 성향에 비춰봤을 때 그 사람이 경험한 것들을 경험하게 그 사람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주고, 용납해주는 것. 그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렇게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다. 아니, 우린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세상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고, 성령님이 도우실 때야 비로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 그때는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렇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받아주는 것과 세상의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이는 그를 처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와 피해를 입히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급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사회적인, 세상에서 이뤄져야 할 처벌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인간적인 차원에서 용서하고 사랑은 해야 하지만, 그 사람을 다 괜찮다고 놔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그 사람이 더 많은 상처를 입거나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일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쉽게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뿐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수용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나 다른 사람을 그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현실에서 그를 마음대로 풀어주란 의미도 아니다.
나의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마음으로 분노하지 말라는 것. 나의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건 마음의 영역이고, 그와 무관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뤄져야 할 조치들은 이뤄져야 한다. 그 사람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이처럼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절반은 감정의 영역에 속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실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 이뤄진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감정, 감성을 돌보고 이성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하루 아침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조금이라도 더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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