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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인류 최초의 직업, 프리랜서

박사학위가 있지만 '학문'을 업으로 해오신 분들 중에 정말 싫어하는 부류의 '자칭 학자'들이 있다. '00학은 원래 말이야~'라는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 마치 본인이 한 전공에는,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취득한 학위에 이름이 붙은 전공에는 고유하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과학성'이라는 말도, 모든 전공에 과학을 붙이는 문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과학'이란 말은 꼭 뭔가를 '객관화'시킨 듯한 느낌을 주는데 사실 모든 과학의 내용은 '이론'일 뿐 그 가설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말은 어느 순간서부턴가 줄 세우고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 된 듯한 느낌이어서, 그 말이 싫어졌다.

그래서 '통섭'이라든지, '학문 간 융합'이란 말을 듣거나 보면 코웃음을 치게 된다. 본디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니까 쪼개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보기 위해 '쪼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쪼갠 것을 다시 합치면서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그건 마치 찰흙으로 만든 다리와 건물을 다시 합쳐서 비행기를 만들고 나서 대단한 변화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닌가? 자신의 학위에 쓰여 있는 학문 고유의 무엇인가가 있는 듯 말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학, 물리학, 생물학 중에 어느 하나를 아예 모르고 하나만 아는 것도 불가능하고, 정치, 사회, 법은 사실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특정한 전공에만 고유한 것'이 있을 수도 있나? 같은 계열에서는 근본으로 돌아가면 모두 그 출발점은 비슷한 게 현실이다.

학문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이는 직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근에 '프리랜서'라는 표현에 열광을 하지만 사실 프리랜서는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부분 사람들의 경제활동 형태였다. 혼자서 어떠한 노동을 해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프리랜서의 본질이 아닌가? 지금처럼 '회사' 또는 '조직'이 철저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오히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원시시대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본인의 생계를 본인이 직접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노예'로 삼아서 누군가를 이용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자신의 요구를 '고용주'에게 요구할 수 있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사회가 만들어진지는 얼마 안 됐다.

이처럼 예외적인 사회가 만들어진 것은 자연 상태 또는 야생상태에서 '프리랜서'로, 자신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직접 사냥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힘이 센 자들이 득세를 했고, 사회 또는 국가 체계를 어느 정도 만든 후에는 사회와 국가단위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가졌으며, 그들은 '프리랜서'로 살아갈 힘이나 능력이 없는 이들을 억압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권침해가 있었고, '사람다움'과 '평등'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지금처럼 '회사' 또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회사와 조직이 그 구성원들에게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갖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이는 사실 회사 또는 조직을 만든 것이 그 존재가 없었을 때보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회사와 조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준수되어야 할 원칙 또는 법을 만든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즉,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보다 조직의 구성원 또는 회사원으로 사는 것이 '안정'의 측면에서 더 바람직한 노동 형태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리고 모든 노동은 결국 조직과 회사의 형태를 지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가 화두이고 사람들이 프리랜서를 꿈꾸는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 조직과 회사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개인이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어느 한 개인 또는 개인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할 회사가,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서 그 구성원들 간에 잘 분배하는 게 '사회적인 목적'이어야 하는 회사들이 어느 순간부턴가 회사를 만든 소유자에 의해 좌우되고, 개인의 성과와 관계없이 정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본말이 전도되어 조직  또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기 시작했고 그러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창업자'를 '소유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이 일정 수준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부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창업주는 창업주일 뿐이고 회사의 소유주는 그 회사의 주식이나 지분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회사들은 작은 회사일수록 그런 개념 없이 개인의 소유물처럼 운영된다. 사람들이 어쩌면, 아니 분명히 더 불안정한 노동의 형태인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랜서는 절대 프리 하지 않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프리랜서는 결국 본인은 개인으로 있으면서 구매자, 조직 또는 회사에서 일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들은 계속해서 '선택'받아야 하고, 다시 '선택'받기 위해 상대에게 어느 정도는 '을'이 될 수밖에 없으며, 때때로 무리한 요구를 들어줘야 하기도 한다. 아무리 관계가 좋았어도 한 방에 날아갈 수 있는 게 일거리기 때문에. 또 회사 안에서의 경쟁만 있는 조직과 달리 프리랜서들은 그 자리를 잡기 위해 자신을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다른 프리랜서들과 경쟁해야 한다. 회사와 일하지 않는 프리랜서들은 일반 대중 전반을 대상으로 자신의 시장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 작업은 더더욱 힘들다.

그렇게 '을' 또는 '정'으로 살지 않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탁월한, 자연상태나 원시시대였어도 생존 가능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도로 구조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구조 안에서 홀로 생존 가능한 수준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구조와 관련된 일을 일정 시간 이상해서 숙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10년이면 강산이 두세 번도 더 변하는 우리 시대의 프리랜서들은 그 안에서의 변화들을 계속 따라가야만 '생존'할 수 있다. 거기다 회사들은 채용하는 것보다 밖에 있는 사람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범위에서만 프리랜서들을 쓰고, 경쟁이 치열한 현대사회에서는 무한경쟁 수준의 경쟁이 시장에 존재한다. 회사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야 한다. 그게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프리랜서로 사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고 피곤해야 하냐고? 이는 프리랜서는 고도로 구조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몇 안되는, 아무런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일해야 했던 인류 최초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끝에는 결국 자신의 조직, 회사 또는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 있는 것은 사실 그것이 조금 더 진화한 노동의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