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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비자발적 프리랜서의 탄생

난 회사원의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군다나 아버지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이는 내가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옆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매달 꼬박꼬박 돈이 입금되는 회사원의 삶 밖에 없었단 것을 의미한다. 대기업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20위권 밖에서,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짜기로 유명한 회사에 다니시는 아버지의 아들로 산단 것은 항상 물질적인 한계는 있지만 굶거나 엄청나게 힘들었던 적도 없었단 것을 의미한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렇게 30년 정도를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내 동생도 졸업하고 취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 집의 가장 큰 관심사는 '큰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안정적으로 수입을 담보받으면서 그 안에서 돈을 많이 벌고 모을 수 있을까?'였다. 나도, 내 동생도 졸업 후 지상 최대의 목표는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 분위기는 분명 그랬다.

돌아보면 그때부터 난 이미 삐딱선을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기자를 하겠다며 언론사 시험을 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고 언론사 시험에 올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졸업 후에 공백기 없이 취업'은 우리 집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였고, 그에 발맞춰서 난 언론사들과 함께 일반 기업에 지원을 했다. 내 꿈 따위를 위해서 백수 또는 졸업을 연장해서 더 버틸 생각은 없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밀어주는 편은 아니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달랐을까?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삶. 언론사도 메이저에만 시험을 본 것은 그렇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도,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난 SK텔레콤이라는, 당시에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곳에 취업을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점에 난 아버지께서 회사 임원 승진을 정치적인 이유로 3번이나 못하시는 것을 봤고, 그로 인해 [대기업=안정]이라고 20여 년 동안 굳건하게 가졌던 나의 믿음이 깨어졌다. 그리고 회사 10년 선배들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평생 회사원으로 살진 않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포기하긴 힘들었기에 회사를 다니면서 로스쿨을 준비했고, 좋은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때는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안정]이 키워드였기 때문에 했던 선택인 측면이 분명 있었다. 순위를 매기면 일정 순위 이상 되는 학교에만 지원을 했으니까.

그런 나의 계획은 당연히 붙을 줄 알았던 변호사시험에 떨어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할까?'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깊게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은 이상이고, 그 과정에서 열심히 살면서 6-7년이 그냥 지나가고 보니 난 박사가 되어있었을 뿐이고, 박사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그리고 지도교수님 조교를 오래 했다 보니 박사로 보낸 첫 해는 그 삶의 연장선에서 방황의 연속이었다.

프리랜서로 살 생각은 없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글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난 회사원의 아들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난 프리랜서의 비정기적인 수입과 농한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그걸 견딜 자신이 없는 사람, 엄청나게 큰돈을 벌고 싶은 생각보다 가늘고 길게 먹고살 수 있는 수입을 올리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큰 사람이다. 하지만 먹고는 살아야겠고, 이젠 나이가 있으니 돈도 모아야겠다 싶어서 프리랜서로 나섰다. 난 그렇게, 말 그대로 비자발적 프리랜서가 되었다.

작년에 프리랜서를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는 장밋빛 희망을 내뿜는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는 그만해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프리랜서가 되었다면, 몇몇 프리랜서들처럼 관련 업계에서 10여 년 일을 해서 일거리를 갖고 나온 사람이었다면, 자격증을 갖고 그 자격증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규정짓는 것이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해야만 했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내 나이 때의 사람들이 올리는 수입은 올리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에서 잠시 회사에 들어갔던 것도 매달 정기적으로 돈이 입금되는 안정감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한 해를 프리랜서로 살다 아는 동생 회사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등 방황 아닌 방황을 30대 후반에 하다 보니 그 삶이 내겐 꼭 그리 나쁘지 않더라. 사실 지금 나이 삶의 방식이 내게 그렇게 낯설진 않다. 20대 중반에, 남의 주머니에서 돈 빼먹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야 한다며 용돈을 끊으면서 과외는 안된다고 하신 부모님의 말씀에, 지금 돌아보면 굳이 과외 부분까지 왜 순종했나 싶지만 어쨌든 순종했을 때 나는 지금처럼 살면서 먹고살았었다. 글 쓰고, 사진과 영상을 찍으면서. 지금은 거기에 학위와 경력이라는 장식품, 그리고 10여 년간의 다양한 삶의 경험이 얹어져 있는 게 조금 다를 뿐.

내가 로스쿨에 갈 때는 '너랑 변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했던 지인들이 역설적으로 지금 내 삶의 방식에 대해선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제는 네가 하던 것들을 하면서 사는 걸 이상하게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좀 편하지 않아?'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 아는 나의 모습들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그런 면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지금 나의 삶의 모습에 대한 시선에서도 그럴지 모른다.

비자발적으로 프리랜서가 되었지만, 그게 프리랜서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단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비자발성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다름에서 오는 간극일 뿐이다. 그리고 난 머리로는 안정을 추구하지만 내가 행복하고 싶은 선택을 하다 보니 프리랜서의 길을 가고 있는 면도 분명 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는 '프리랜서'와 '백수'는 구분해야 한다. 프리랜서와 백수는 '최소한 내 생계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입을 단순한 알바가 아닌 내가 가잔 능력이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 텐데, 내게 주어지는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비자발적 백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프리랜서라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 그래도 '프리랜서'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계약을 하든지, 본인의 결과물을 팔든지 해서 수입이 있어야 한다. 야생에 비자발적으로 내몰렸지만, 그 안에서 그래도 1년을 통장 잔고가 줄지 않고 버텨냈다. 작년 연말에는 그 사실만으로도 대견하게 여겨주기로 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자발적 프리랜서'들이 더 위험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뛰쳐나온 사람들. 그렇게 나왔는데 본인의 성향이 전쟁터를 넘어 지옥 같은, 밤낮과 휴일과 무관하게 일을, 때로는 꿈속에서도 해야 하는 프리랜서의 삶이 맞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프리랜서가 아닌 힘든 자발적 백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평생 함께 하는 우리 자신도 잘 모른다. '자발성'이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가게 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자발적 선택의 연속'에 의해 가게 되는 길들도 있다. 내 안에 있는 기본적인 성향의 영향을 받아서. 나는 조직에 구속되지 않고 프리랜서로 사는 삶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어떤 이들은 본인이 회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직형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가 어떤 성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에서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작년 연말에 오랜 고민 끝에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올해는 하지 않았을 선택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프리랜서는 어느 정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은 안고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계약 얘기가 오가고는 있으나 아직 올해 계약된 건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ps. 그런 면에서는 뭐든지 좋으니 언제든지 일거리를 주시면 가리지 않고 받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