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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프리랜서는 자발적으로 '을'이 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인에게 일을 받아서 납품까지 마쳤는데, 연락을 살갑게 잘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지인도 지금 회사 일이 엄청 바쁘다 보니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사이에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갑작스럽게 받은 일이라 정신없이 처리했는데 이상이 있었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입금은 되겠지?'라는 생각까지. 저 밖에는 나를 대체할만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고, 내가 한 일이 한 번 아니라고 판단하면 내게 주려던 일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단 것을 알기에 프리랜서들은 작년에 같이 일을 했고, 그 후에 올해 다시 일감을 줬고 앞으로 일을 더 주겠다고 했어도 긴장하고 불안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지인이면 낫지 않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지인을 대하는 것이 더 어려운 면도 있다. 이는 지인들은 아무리 마음에 안 들거나 불만이 있어도 그게 엄청나게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면 대놓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완전히 일로 만난 관계 거나 앞으로 인연을 이어가지 않을 사이라면 '일을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앞으로는 같이 하기 힘들 것 같아요'라고 할 수 있지만 지인들은 그렇게 매정하게 할 수 없으니 조용히 뭉개면서 일을 넘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인을 통해 일을 받으면 더 긴장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상대가 본인 조직 안에서 나로 인해 평판이 안 좋아지거나 입장이 난처해지면 안 되니까.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지인에게 일을 받았을 때는 특히 비용 지급이나 후에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서 직접, 세게 말하지 못한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혹시나 내가 실수하지 않았을까 조심하면서 돌다리도 두드리듯이 눈치를 보며 연락한다. '혹시... 비용 지급은 어떻게 됐어? 이번 일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라고. 그에 대해서 '아 비용 정산 제가 정신없어서 못했네요. 지금 담당하는 친구한테 처리하라고 할게요'라고만 반응이 오면 또 소심해진다. '일은...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앞으로 받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라면서...

지인일 때는 이런 관계가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그나마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볼 경로가 있다는 면에서는 그나마 나은 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지인이 아니라 완전히 업무적인 관계일 경우 프리랜서는 더 냉정한 현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갑님'들은 대놓고 불만을 말하기도 하고, 본인들 상황을 말하면서 기존 계약이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어서 이렇게 바꿔야겠다고 하기도 한다. 프리랜서들은 어지간하면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본인이 슈퍼 프리랜서가 되어서 일을 고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아니, 사실 지혜로운 프리랜서라면 본인이 지금 슈퍼 프리랜서라고 그런 상황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 본인의 일감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니까. 

프리랜서들은 보통 한 두 개 업계에서 일을 받고, 그 업계가 엄청 넓은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다시피 한다. 본인의 경력이나 전문성에 비해서 돈을 너무 적게 주려고 해도, 본인이 다른 대안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많은 프리랜서들이 일단 최대한 밝게 웃으면서 일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시장을 교란한다며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도 남들 모를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고 합당한 보상을 요구했다가는 이번 일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이후에 일이 끊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발적 을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게 아니더라도 프리랜서는 항상 자신에게 일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는 대부분 프리랜서들은 결국 '남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맡은 일이 잘되어서 내게 일을 준 사람의 이해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그 방향에서 일이 더 들어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번 일이 잘되었다고 본인한테 일을 준단 보장이 없지 않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보통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엄청난 실수가 있거나 일 자체를 망친 게 아니면 '어지간하면' 같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또 그 '어지간하면'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프리랜서들은 보수적으로,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받거나 슈퍼 프리랜서인 사람들도 결국 일을 주는 사람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프리랜서로 있는 이상 자신의 지위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끝까지 낼 수는 없다. 이는 세상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고, 엄청난 능력이 있는 프리랜서라고 해도 그 보다는 못하지만 큰 티가 나지 않고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동종업계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소송을 하지 못하거나 참고 넘기는 프리랜서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일을 계속 받기 위해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실력이 있다고 일을 많이 받아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게 아니고 다른 변수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프리랜서들은 그래서 자발적으로 을이 된다. 상대가 '꿇어'라고 하거나 일을 끊기 전에 선제적으로. 물론, 그 수준이 덜한 프리랜서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로 숙이고 들어가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모든 프리랜서들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자발적으로 을이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프리랜서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실력은 물론이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느 정도는 정치를 하는데도 능해야 한다. 문제는 관계를 형성하고 정치하는데만 치중하면 또 어느 순간 일이 끊길 수 있다는 데 있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건, 이런 프리랜서들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