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요가를 하면 안된다는 말에 '뭔 소리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하는 요가가 나쁠게 뭐가 있다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나도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안한지 오래됐다. 이제 요가는 수많은 운동 중 한 가지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클럽하우스에서 홍정욱씨가 자신의 에세이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방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명상에 대한 방을 열겠다고 예고하시는 것을 듣고 그 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었다.
사실 최근 몇 달간 마음도 복잡하고, 두려웠다 괜찮았다가 반복되어왔다. 몸은 거의 고정적으로 안 좋은 상태고... 말씀도 잡았다 안 잡았다 (망할 놈의 레위기와 민수기 초반 ;;;;;; 도저히 머리에 들어오지도, 묵상도 안되는....) 했고... 그렇다 보니 예전에 잠시 시도해봤던 명상에 대한 얘기가 궁금했다.
명상용 음악을 듣고 호흡에 집중하는 걸 몇번 해보고, 이 영상 저 영상을 유튜브에서 틀어놓고 명상 가이드를 따라 하다보니 어느 순간 불편함이 느껴졌다. 가이드에서 강조되는 [나]가 불편해졌다. 그리고 명상을 하면 할수록 '이거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싶었는데, 그 날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깨달았다. '기도 잘 될 때 느낌이구나!'라는 걸.
내가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요가는, 명상과 같은 맥락에, 같은 선상에 서 있다. 일종의 몸으로 하는 명상이란 측면에서.
이런 요가가 위험해질 수 있는 부분은 사실 [나]에 집중하는 부분에 있다. 단순히 요가 동작을 하고, 훈련하는 것까지야 운동이니 문제될게 없다. 스트레칭하고 내 몸을 단련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이면에 전제된 철학은 하나님, 성령이 아니라 나를 다듬으면서, 내 안에만 집중한다는 면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없진 않다.
기독교인의 차원에서의 수련은 세상의 가치에서 분리되어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만약 요가를, 명상을 자신 안에 하나님이 얼마나 있는지, 자신안에 세상적인 가치, 욕구와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묵상한다면 그게 문제가 될 이유가 없지만, 내 자신만 돌아보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내 자신을 단련하는데만 초점을 맞추면, 그건 기독교적인 차원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나 신앙은 이처럼 미묘한 접점과 차이점이 있다. 사람들이 모로 가도 정상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 것도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그 미묘한 접점이 아니라 미묘한 차이에 집중해야 한다. 그 차이가 시간이 지나고, 누적되면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가 두 사람의 신앙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신 삶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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