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난 저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라면서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된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신학자들만 그럴까? 대부분 사람들이 구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의아해 할 것이다. 겨우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도, 한 번의 실수들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신 것도 그렇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해야 한단 글은 이전에 쓴 적이 있다. 요약을 하자면, 우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여러 세대를 살아서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없고, 성경도 없으며, 오롯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했고, 구약이 배경이 된 시대에는 힘있는 자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들이 인정을 받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 사회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알아가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셔야 했다. 율법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씀이 없는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디테일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도구이자 수단이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과 매일, 절기마다 루틴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구약의 원칙과 제사들은 같은 기능과 역할을 갖는단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본인이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어와 문화로 소통하셔야 했다. 지금은 다를까? 오늘날에는 능력주의와 인간의 노력이 중요시 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노력하고 능력을 갖춰야 비로소 우리를 통해 일할 수 있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세대다. 성경이, 텍스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내용들과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은 간단하게 패스하고 [야, 현실적으로 이래]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원칙과 원리를 앞세운다.
이 말이 먹히는 것은 그게 그럴 듯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방에 누워있다고 해서 입에 누가 넣어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 생각이 너무 가득 차 있어서 누구도 대천덕 신부님께서 하셨던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계신지를 실험하려는 사람도 없다 (대천덕 신부님께서 예수원을 태백 구석에 만드신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람의 발길도 거의 닿지 않는 곳에 자신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먹고 살리실 수 있을지-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는지-를 실험해보기 위함이었다.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그런 오늘날 우리 세대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깨달아 알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힘을 갖고 언제든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입증할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오늘날에 그에 상응하는 것은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정말 최선을 다해도, 심지어 여러가지 상황과 인생의 방향을 봤을 때, 기도하고 묻고 말씀을 읽어봐도 주시는 마음이 이 방향이 맞는 것 같은데도 길이 열리지 않고 벽에 부딪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1%라도 우리의 성취가 우리의 것이라고 느끼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신뢰하기 위해서 그런 시간과 경험의 반복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한 번했다고, 그렇게 막혔던 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한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견고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한계를 갖고 있게 때문에 그런 경험들을 반복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구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인, 믿음이 부족한 내가 보기에도 갑갑할 정도로 [우리를 왜 굳이 이집트에서 끄집어냈냐]라며 모세를 원망한다. 한 번이 아니다. 여러 번 그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기엔 "인간적으로 저 정도 기적을 보여줬으면 믿어야지"싶은 일들을 여러번 겪으면서도 그들은 또 그걸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 동네 사람들은 너무 대단해서 우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신게 아닌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나서도 다음번에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뭔가를 하려 하고,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물론, 우리의 힘과 노력이 그 과정에서 수반되어야 한다. 그건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1%의 차이가 모든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으로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성취로 인해 오만해지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한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경험을 한 번해도 그 기억이 희석되어 다음엔 똑같은 실수를 한다.
다행인 것은, 한 부위에 근육 운동을 반복하고 무게를 늘려가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근육이 크고 단단해지듯, 그런 벽에 부딪히고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는 반복하다보면 우리의 믿음도 조금식 단단해지고 커진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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