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

악한 자의 성공에 대하여

악한 자들이 성공하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성경에도 많이 나오고, 나 또한 그렇게 분노하면서 하나님께 따지며 살아왔다. 그런데 악한자의 [성공]이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관점이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악한 자의 성공]이라고 할 때의 '성공'의 기준은 세상적인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삶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성공에 대한 기준이 달라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성공은 물질적 풍요로움, 권력과 명예가 아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을 쫓는 삶을 우상을 쫓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을 칭하는 의미로 그에 대해 성공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살면 안된단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성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계획을 찾아서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의 성공은 이 땅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우리 개인의 물질적 풍요로움, 권력, 명예를 수단으로 해서 이뤄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사실 기독교인에게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우리는 [악한 자의 성공]에 대한 평가를 '지금'한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위에서 설명한 잘못된 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든. 그것을 머리로 알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악한 자의 성공은 현재적 관점에서는 풍요롭지만 그 끝이 분명하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악한 자의 성공은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악한 자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더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리를 하다보면 본인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신해서 주위에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누적되다 보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깡패 두목의 끝은 적지 않은 경우 자신의 부하의 배신에 의해 이뤄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악한 자들은 끊임 없이 욕망하고 탐욕을 부릴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의 끝은 좋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을 누리다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떨어진 후의 삶은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사람들보다도 힘들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의 하루, 하루가 과연 행복하고 좋을까?

물론, 겉으로 보기에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실패하지 않는 악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의 하루, 하루가 항상 즐겁고 좋을까? 아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주는 즐거움에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에는 금방 익숙하고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 악한 자들이 망하는 것도 이러한 속성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것을 쫓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인생이 허망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유세윤이 자신의 유일한 목표였던 성공한 개그맨이 된 이후 허무함에 빠져 방황한 것과 같은 경험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고, 그들이 계속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그 허무함을 느낄 틈을 없애고 싶기 때문이다. 무조건 더 많이 갖고, 유명해지고 커지는 것이 행복과 즐거움을 담보해준다면 왜 부자들 중에 술, 마약, 여자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지겠나?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 그 끝을 알기 때문에 세상적 성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 안에 만들어 놓으신 메뉴얼을 따라 사랑하고 베풀면서 사는 것의 온전한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악한 자드의 성공이 부러울 이유가 없다.

악한 자의 성공이 부러운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러한 성공을 하고 싶은 욕구와 욕망이 있기 때문이고, 그러한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다. 아무런 망설임이나 꺼리낌 없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인 자신을, 하나님을, 성경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은 절대 필요 없어! 중요하지 않아!'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린 모두 약점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물질,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은 필요하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나는 새와 땅에 나는 풀을 들어 너희를 먹일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그러한 필요는 충족시켜주신다는 것이지 너희를 부자가 되게 해주겠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물질적 풍요로움과 여유를 누리는 기독교인이라면, 거룩한 부담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본인이 누리는 풍요로움과 여유만큼, 그 덕에 본인이 챙기거나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넓어진만큼,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풍요로움과 여유를 허락하신 이유이기 때문에.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가, 명상과 기독교  (0) 2021.02.23
성경무오설에 대하여  (0) 2021.02.15
일과 소명  (0) 2021.02.12
'선택받은 자'란 거대한 착각  (0) 2021.02.09
복음이 왜곡된 현실에 대하여  (0) 202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