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물질에 대해 완전히 모순되는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걸 동시에 강요한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단 청빈론적 입장이고 두 번째는 물질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란 것이다.
이게 좋게 해석하면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실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는 이상하게 두 가지를 부정적으로 활용한다. 물질을 추구하는 삶은 청빈론적이지 않단 이유로 함부로 판단하고, 물질적으로 빈곤해지면 그건 또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니 설사 물질이 축복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물질을 주지 않으시는게 그 사람이 잘못되었단 것은 아니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물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그 사람을 벌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런 기준으로 따지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처벌하신 것이란 말인가?
또 그렇다고 해서 물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면서 청빈론적인 입장이 맞는 것도 아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우리가 사용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가 왜 그것을 인위적으로 쪼들리고 덜 갖기 위해 노려해야 하나?
물질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징표도 아니고, 우리가 물질적 풍요로움을 배척해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물질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 물질을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서 위에 놓으면 안된단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맞는 때에 가장 필요한 수준의 물질을 허락하실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때로는 물질적으로 조금 부족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 수도 있고, 어쩔때는 일단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는 것이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만, 청빈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 청빈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물질적 필요와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는 충족되어야 다른것에 눈을 돌리고 베풀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은 본인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그 물질을 지키고, 더 많이 확보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적 풍요로움은 나를 통로로 쓰시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기억하고 언제든지 베풀 수 있는, 흘려보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혹자는 이 즈음 되면 '그럼 다 기부하란 것이냐'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극단적인 청빈론적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돈이나 물질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일을 통해서, 시스템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물질에 대한 고민과 염려가 덜어져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내 개인의 생계나 생활이 해결되지 않거나 내가 충분히 쉬고 심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안되는 사람은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사업을 할 수 없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도 기본적인 필요가 해소되지 않으면 현실의 문제에 매몰되어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또 반대로 너무 물질을 많이 갖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물질을 지키고 불리는데 집착하게 될 수도 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창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창의성을 끌어올리기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는데 초점을 맞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람을 살리는 사업을 하고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넘쳐 흐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절실함이 없어서 그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축복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건 개개인이 고민하고 돌아볼 영역의 문제다. 내게 주어진 소명을 최대한으로 잘 감당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의 물질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이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도의 물질 말이다. 어떤 이들은 물질에 대한 타고난 필요가 덜하고, 어떤 이들은 주어진 소명에 집중하기 위해선 더 많은 물질이 현실적으로 필요하기도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물질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어떤 것을 심어놓으셨는지]를 아는게 우선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사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나의 물질적 부족함을 실제의 부족함에 비하면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 작년 10월까지도 내가 갈 길에 대한 고민과 방황은 길었어도 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가끔 한번씩만 인지할 정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난 1-2개월 동안 처음으로 내 금전적인 상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비슷한 수준으로 버텼던, 아니 때로는 더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내 상황이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이면서 내 상황의 한계가 보이고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몇 년간 내 눈을 가려놓으셨다가 이제서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처럼.
낯설진 않았다. 지난 몇년간 금전적인 부분들이 아닌 다른 부분들에 있어서 반복되어온 패턴이었다.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괜찮고 멀쩡하다고 인지하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현실적으로 심각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패턴. 그게,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주시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그 영역에 눈을 뜨게 해주실 때는 보통 이유가 다 있더라.
사람들은 이해가 안되겠지만 30대 내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1순위에 올라온 적은 없었다. 아니, 5위 안에도 잘... 물질적으로 부족했지만 또 그때마다 내가 꼭 필요한 수준의 수입은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고 '야... 이젠 수입이 없네 어쩌지...'했더니 이젠 잔고를 깎아먹지는 않을 정도의 수입이 상당기간 동안 보장되는 일에 들어가게 됐다. 하나님은, 항상 이딴 식이시지... 하...
오랜만에, 아니 어쩌며 처음으로 이젠 정말 돈이 되는 일에 돈을 벌기 위한 일을 벌리기로 했다. Boundary가 있다면, 내게 주어진 재능과 소명의 범위 안에서. 작년까지만 해도 솔직히 나의 체면, 세상의 평판 등이 두려워서 벌이지 못한 일들이 있었는데, 유튜브도 그래서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했는데, 이제 그런건 덜 의식하고 일단 일을 벌려보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물질에 대한 나의 시선과 인지능력을 막아주신 건 어쩌면 그 기간동안 내가 물질에 매몰되지 않게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질을 추구하되, 과도하지 않게, 인생에서 한 3-4순위 정도에서 유지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워주시기 위해 그 부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돈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욕구와 욕망의 특징상, 그런 근육이 생기지 않았다면 난 돈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삶을 살 사람이었음을 내가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혹자는 왜 돈을 그런 목표로 삼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 이유도 명확하고, 난 그에 대해 당당하다. 그건 어느 정도 물질적 여유는 있어야 내가 더 많은 글을, 소신을 갖고 쓸수 있게 된단 것을 머리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물질적으로 힘들고 부족한 상태에서는 돈이 되는 글이라면 일단 쓰고 볼 수밖에 없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금전적 안정을 확보하고 가려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나의 금전적 안정을 확보하는건 쉽지 않다. 이는 세상은 정말 가치있고 좋은글보다는 유명한 사람이 쓴 글을 좋아하고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팔릴 글이 아니라 의미있는 글을 쓰면, 주목을 받기는 더 어렵다. 나도 어떤 글이 팔리는 지는 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쓸 생각은 없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많이 쓰고 최선을다하면서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은 내 글들이 선택받아야 하는 것이고, 팔릴 글을 주구장창 쓰지 않는 이상 무명의 필자인 내 글을 선택하고 팔아줄 사람은 쉽게 나오지 않을테니까. 내 노력만으로 그게 이뤄질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이야기와 생각을 더 많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리는 이야기꾼으로 살다죽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다음주에 제주도에 다녀온 다음부터 죽어라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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