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이었다. 아니 이렇게 다 구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걸 다 주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땅의 물질도, 재화도, 시간도 제한되어 있는데! 그런데 무엇이든지 다 구하라고 하시다니! 이게 사기꾼이 아니면 뭔가!
실제로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산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배우자 기도'에 대해서도 목록을 만들어 놓고 기도했더니 그대로 들어주셨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면, 서낭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면 신령님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이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왜 그렇게 쓰여 있을까? 우린 딱 여기까지만 편집해서 말씀을 보는 경향이 있고, 그 바로 뒤에 나오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어보자. 우린 정말 무엇이 우리를 위해 최선임을 알고 있나?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정말, 반드시 필요하며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지를 알고 있나? 물질적 필요는 어느 정도는 충족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시점이 되면 증가하는 물질양 대비 효용이 낮아지는 건 여러 연구들이 이미 입증한 바 있다. 우리는 항상 이것만 가지만, 이것만 이러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 것도 우리를 완벽하게, 지속가능하게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단 것을 우린 너무나도 잘 안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이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행복을 줄지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어느 정도 이상 알기 이전까지는.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달라는 것을 무조건 주는 것은, 어린 아이가 독약을 달라고 해서 독약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단 것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아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단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계획을 깨달아 알아서 그에 따라 살며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힘들어도 우리가 그 힘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심어놓으신 계획과 마음을 알 수 있다면, 그게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선 '좋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수 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때 우린 '아 ㅆㅂ 하나님이란 작자가 ㅈ같네 진짜 ㅆㅂ'과 같이, 내가 자주했던 것 같이 하면 안되고, 하나님께서 왜 내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심어 놓으신 것을 알아가야 한다. 그게, 나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되어 가는과정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 들어주셨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와 그 사람이 그게 원하는 이유가 달랐는데 현상만 우연히 겹쳤을 수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비유를 하자면 그건 마치 누군가가 세금을 아끼기 위해 재단을 세우고 기부를 했는데 그걸 기부받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기부했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로 사실 하나님께서 그걸 다 들어주신 것도 아니고, 그저 본인에게 (하나님의 기준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걸 '그대로 들어주셨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배우자 기도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배우자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본인의 목록에서 몇 가지는 '안들어주셨지만 이런 게 있으니 더 좋은거야'라거나, 실제로 맞지 않는 면을 본인이 맞다고 억지로 해석해서 그러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억지로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일단 숨을 쉬게해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게 기도의 응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부분이 사실 세 경우 중에 가장 주관적인 생각이긴 한데, 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마음, 심리 상태를 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더 깊게 알아갈 수 있는 상태에 따라 그에 맞는 것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허락하는 것도 하나님께선 그들에게도 계획이 있는데 일단 그들에게 지금의 풍요로움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완전히 떠날 수 있기 때문에, 돌이키게 하시거나 다른 사람이 그 사람 삶에 개입해서 흐름을 바꾸기 전까지 일단 그 길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직 [오지 하나님만 보기 위한 훈련]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에게 당근을 주실 때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건 사실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일단 달래기 위해 준 장난감과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이것달라, 저것달라라고 하지 않게 된다. 이는 무엇인가를 달라고 할 때 지금 당장 그게 내게 반드시 좋은 것일지를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린 점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지금 당장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받아들일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우린 항상 욕망하는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 저는 이런이런게 사실 갖고 싶은데, 이걸 원하는데'라고 말하며 '하지만 그게 내게 지금 필요한게 아니라면, 왜 그런지를 알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없다. 이는 우린 어렸을 때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하나님보다 세상과 접점을 많이 갖고, 세상의 가치관에 온전히 노출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대부분 세상의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기준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힘들고,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키우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오래 걸리듯이.
그 과정을 거치고 나오게 되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간단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상황을 보고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그게, 우리의 유일한 기도가 된다. 그렇게만 되면 우린 평안할 수 있을테니까.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진로에 대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선택을 알아보게 해달라고, 배우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가장 좋고 기뻐하시는 상대와 내가 서로를 알아보게 해달라고, 물질에 대한 기도는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자족하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그런 기도가, 나의 욕구와 욕망은 솔직하게 내놓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알기를 원하는 기도가 진짜 [내려놓음]의 기도일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인간이 '이거 없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괜찮아질 수 있는 존재인것처럼 '내려놓음'을 얘기하는데, 우린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순간 그럴 수 없는 자들이다. 내려놓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셔서 할 수 있게 하시는 일이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우리의 뜻과 욕망과 욕구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현상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다른 것은 솔직히 구하면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항상 묵상하고, 그리 아니하시면 왜 그리 아니하셨는지를 놓고 알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 힘과 노력과 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선 성령님을 통해 우릴 도우셔서 알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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