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작 과정에 참여한 이후 작가교육원에 다니고 있다. 작가교육원에서는 단막 대본을 과제로 제출해야 하는데, 얼마 전에 내 대본에 대한 합평이 이뤄졌다. 30대 후반의 남녀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이야기. 남자는 여자의 나이가, 여자는 남자의 경제적 안정이 신경쓰여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두 사람이 서로 고민하는 그림을 보여주려면 전형적인 멜로와 달리 두 사람을 빨리 붙인 후에 서로 떨어져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두 사람을 단막 안에서 다시 붙이려면 두 사람을 붙일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정적 계기'로 직장내 성희롱, 성추행을 잡았다. 개념 없이 함부로 30대 후반의 여자에게 결혼이 늦었다고, 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말하면서 성추행도 하는 남자 임원 캐릭터.
참여했던 작품의 작가님도, 대본에 대한 합평문에도 그 부분이 비현실적이라는 식의 피드백은 없었다. 그런데 정년퇴직하신 연세가 있으신 담임께서는 그 내용이 많이 불편하셨던 것 같다. '요즘 회사에서 이런 얘기 하면 큰일난다', 큰일 날 얘기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개념 없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그걸 짚고 싶어서 쓴거다. '대기업 임원이 이런 모습을...', 모르시나 본데 술 들어가면 여전히 그러는 임원과 팀장들 적지 않다. 심지어 '두 사람의 멜로를 붙이기 위해 이런 필요 없는 씬은 삭제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화가 났다.
불편하신게 보였다. 어쩌면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셨더라도 본인 세대 혹은 그 직후 세대의 남성들의 치부를 들추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80-90년대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갔을 대화들이었을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성추행과 성폭력에 시달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셨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사실 성희롱적인 얘기와 성추행적인 경험이 거의 일상처럼 반복된단 것을 모르기 때문이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깨와 허벅지를 만지는 성추행을 당하고 나서 그 남자가 여자가 걱정되어 찾아오면서 두 사람이 감정을 확인하는 엔딩을 가져갔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성추행을 당하고 나서 이런 감정이 드냐'고 하신 것을 보면.
캐릭터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30대 후반에 대기업에서 팀장이 된 여성은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하고 참고 버텨야 하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함께 일했던 작가님은 '도대체 왜 여기서 참고 버티게 만드냐'고 하셨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실에서 많은 여성들은 찔러봤지 달라지는게 없단 생각에 이 악물고 일단 버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적지 않은 여성들은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단 것을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버티고, 이 악물고 올라가서 뒤집겠단 마음을 갖고 있는 여성으로 캐릭터를 설정했고, 누구도 그런 자신을 걱정해 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후에 판을 뒤엎고 나서 자신을 걱정해서 찾아온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그런 의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불편한 장면이니까' 씬을 삭제하거나 엔딩을 왜 이렇게 가져갔느냐는 식으로 피드백을 주시는데, 화가 났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 암암리지만 어쩌면 만연하게 이뤄질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미디어에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런 얘기를 다루지 않기 때문일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얼마나 참고 버티고 있는지를 눈 앞에 이야기로, 그림으로 보여주면 그제서야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리는 사람들이 그걸 본 사람 중에 한두명은 있지 않을까?
불편하다고 피하고, 자신이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집단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이야기를 잘라내는 의사결정들을 수많은 피디들이, 남성 중심적인 방송계에서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소설이, 픽션이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불편한거로 따지면 최근에 여기저기에서 나온 막장드라마들이 더 심하지 않을까? 아니, 정말 시청률을 의식한다면 여성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편성표를 일정부분 채워야 하는게 아닐까?
합평이 끝나고 나서도 화가 났고, 같은 남자인게 부끄러웠으며, 강의실 안에 있던 다른 여자분들은 성희롱적인 발언하는 임원의 씬을 지우는게 나을 것 같단 얘기에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게 불편한 현실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여전히 뱉고 있는데 그 씬을 정말 지워야 했을까? [두 사람의 멜로를 붙이기 위해서]란 말이 핑계로만 들린 건 나 뿐이었을까? 그렇게 침묵하고, 불편하단 이유로 잘라내는 것이 우리 사회에 그런 행위들이 일어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인식은 있으신걸까? 불륜은 괜찮은데 왜 성폭행도 아니고 성희롱과 성추행은 불편해서 잘라내야 하는 걸까?
이해가 되지도, 그 피드백이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내가 쓴 글이야 겨우 수업과제로 낸 것이지만,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일상에서 여성들이 어떤 현실에서 일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녹이는 씬과 이야기들이 담긴 드라마나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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