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God had helped the Levites who were carrying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seven bulls and seven rams were sacrificed. (역대상 15장 26절)
성경무오설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난리, 난리를 치겠지만... 오늘 문득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이 도우셔서'라는 부분은,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께서 000를 하셨다'는 하나님께서 본인이 하셨다고 말씀해주신 부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결국 인간의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규정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술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들 조차도 고민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위만을 따지려 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왜]라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나와 있는 [왜]에 대한 설명들은 사실 굉장히 단편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내용을 기술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사고체계 안에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더 큰 뜻은, 진짜 이유는 문리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그림으로, 신구약을 관통하는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지 쓰여진 그대로 그냥 읽힐 성격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 해석에 쓰여야 할 기준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하신 것은 아마도 그게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을, 100%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아들이 희생되면 다른 사람들 중에 상당수, 아니 일부라도 한 명 이상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 자식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숫자적으로는 다수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지만, 요즘에는 그게 정당화 되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 한 사람이 [내 아들]이라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내 아들을 살리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아들을 내놓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구약도 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게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슬람과 구분하는 선이니까. 정말 물리적인 문리해석이 위험한 것은 이처럼 맥락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배척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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