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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말씀묵상-2021년

성경을 읽을 이유, 방법과 목회자의 역할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아침에 잠시 '아차'하면 잊어버리고 저녁에는... 맨날 생각이 많아서 생각하다 보면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잠이 든다. 주 2-3회 정도는 밀린 진도를 따라 잡으며 읽지만 매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몇년 전부터 아주, 매우 강한 주관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디테일하게 알 필요는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성경 구석구석과 역사들을 디테일하게 암기시키고 공부시키는 한국 교회들의 성경공부 문화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그렇게 디테일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큰 그림을 놓치게 되어있고, 우리의 현재와 아무 상관 없는 이스라엘의 옛날 얘기를 그렇게 디테일하게 알아서 뭐하나 싶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알기 힘든, 공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공부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나? 아니, 그런 기준이라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성경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심지어 12-13세기에는 교부들도 문맹들이 많았다는데 그들은 그러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성경의 핵심은 뭐가 어떻게 일어났고 하는 디테일들이 아니다. 물론, 성경을 읽으려면 기본적인 성경이 다루고 있는 시대의 분위기, 사회상 등의 지식은 필요하다. 그래야 맥락적으로 조금이라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은 큰 그림만 알면되지 작은 디테일들까지 알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일하셨고,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게 더 중요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내가 하나님을 언제 만났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심지어 모가수와 이단으류 분류되는 한 계열은 우리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언제부터 사랑했는지를 딱 찝어서 알게 되나? 상대가 눈에 보이는 상대를 사랑하는지 여부도 알기 힘든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것, 상대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시기나 시점이 있다는 건 신비주의적인 관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배경주석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 성경이 다루고 있는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와 구조를 이해하는 전제하에

'하나님은 왜 이러셨을까?'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목사들은 성경을 디테일하게 이해하고, 공부해서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그에 대해서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디테일까지 다 알아야 할 것은 엄연히 말하면 목회자의 일이지 (알 수도 있지만) 평신도까지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을 읽어야 할까? 그것도 하루에 읽는 내용도 제한되어있는데, 모든 그림을 다 볼 수는 없는데.

하나님 생각을 매일 하기 위함이다. 롱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연인이나 부부는 서로 사랑할수록 만나는게 좋은 것처럼 사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매개체인 기도와 말씀 읽는 것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이가 안 좋은 연인과 부부의 사이가 좋아지기 위해서는 상대 탓만 하는게 아니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떤 마음이라고 했는지를 다시 떠올리면서 자신이 한 행동을 같이 반추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가깝지 않다면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떤 이유와 배경에서 어떻게 다뤘는지를 반추해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멀어져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기억하거나 알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해가 안되는 건 목회자드에게 물어보고 확인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본인이 말씀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 목회자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단순히 심방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듣고, 위로 해주는 게 아니라 (그런 역할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성도들이 말씀을 읽게 하고, 말씀을 읽는 성도들의 의문과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사실 성도의 개인적인 상황을 목사는 완벽하게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어설픈 심방과 조언과 기도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말이다.

목회자는 성경 전문가여야하고 절대로 인생 전문가일 수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신대원의 구조와 구성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절대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하라고 해서도 안되고, 성도들은 그걸 바래서도 안된다. 본인 인생은 본인이 고민해서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성경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 같은건 목회자들이 하지 않도록 조언할 수 있고 본인의 생각을 조심스러게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게 무조건 정답인 것은 아니다. 결국 본인의 일과 마음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목회자가 기도는 해줘야 하지 않냐고? 그건 목회자만의 일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 함께 해야 할 일이다. 목사가 기도해주는데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모두 기도다. 그리고 목회자는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연스럽게 기도도 더 많이 해주게 되고 말씀도 더 많이 읽게 되겠지만 기도가 목회자에게만 지워진 짐이나 책임, 의무는 아니다.

성경 내용을 디테일하게 알고 지식이 많은거, 그 자체가 나쁠건 없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한계를 갖고 있어서 그런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걸 많이 알고 있다보면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게 될 때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 많음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오만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많이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현생을 유지하면서 그런 지식까지 다 머리에 쑤셔 넣기가 힘들다는 것, 우리 모두가 그런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게 말씀 읽기의 1순위는 아니다. 말씀에서 더 중요한 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고 왜 이렇게 일하셨는지를 알고, 말씀을 읽으면서 그걸 매일, 매일 기억하며 삶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지식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습득되는 것이고, 지식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