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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문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쨌든 홍보실에서 일을 했고, 학부시절부터 일종의 대중 커뮤니케이션을 해왔던 사람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니 성경은 '커뮤니케이션과 대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 얘기를 하려고 오랜만에(?) 이 공간에...

어렸을 때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질투가 많고, 소심하고, 폭력적일 수 있냐고 말한다. 심지어 신학자들 중에서도 그런 이유로 학문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긴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생각이 짧은 결정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 걸음만 물러나서 성경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데...

그런 시선을 짧은 생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래도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알 수 있었을텐데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소통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된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본인이 고민해 봐야 할텐데, 그렇게 고민해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음을 알 수 있을텐데 그렇게 결론 짓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창조론과 진화론의 프레임에 갇혀서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봤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성경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창조가 성경의 출발선이 될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이는 창조의 이야기는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졌어]라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창조 이야기에서 앞에 나온 것들은 일종의 내러티브를 깔아주는 이야기고 핵심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다]에 있고,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그 안에 악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그 두 가지 전제를 깔고 읽고, 해석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까지 더해서.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의 서두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악함을,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수도 없이 조상들에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말로만 들은 자들이 어떻게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습으로 살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욕구와 욕망에 사로 잡혀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 그게 구약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날처럼 이성과 합리성이 강조되지도 않았고 될 수도 없었던, 상당수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도 없고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책도 많지 않았던 시절에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과 소통해야 했을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때로는 직접 자신을 드러내서 소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통하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지멋대로 굴었다. 그들을 어떻게 돌이켜야 할까?

아이가 만약 계속 팔팔 끓는 주전자에 손을 대려고 하면 부모는 어떻게 하나?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 잘했어. 라고 하나? 아니다. 온갖 겁을 다주고 혼내고 야단칠거다. 그게 부모노릇이다. 계속 잘못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협박하고 겁주는게...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건 아이에게 혼내는 정도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차 없이 처버린 것 아니냐고? 일단 구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엄청 겁을 많이주고 미리 경고하시는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굴 때리거나 죽이려고 하면 그 사람한테 예고를 다 하고 때리고 겁을 주나? 아니다. 그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뒤통수를 빡! 하고 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저렇게 할거다라고 하시는 건 사실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는 얘기다. 아이들에게 '0000 안하면 너희 0000하게 된다'라고 겁을 주면서 아이가 할 걸 하게 만들듯이 말이다.

다른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지 않냐고? 하나님께서 그걸 안하셨나? 광야를 지나면서 이미 떡주고, 달래고, 어르셨다. 부모가 언제 회초리를 드나? 아이들이 더이상 말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때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을 보면, 창조 때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구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드러나는 방식으로 소통하실 수밖에 없단 것을 알게 된다.

구약의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을 정해 놓고, 그 프레임에 맞춰서, 그걸 기준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나한테 이것저것 이것저것을 줘야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이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하면 그걸 주는 부모가 있을까? 없다. 그걸 안 주는 부모가 잘못된 건가? 아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소통 방식은 비판받아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칭찬하고 달래서는 창조때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아셨기에 부득이 하게 회초리를 드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메시지를 중심으로 쓰인 문헌들을 모아놨는데, 구약 전체는 수백, 수천년에 거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상황들이 100배 이상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걸 다 참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셨다. 인내하셨다. 왜 그건 생각하지 않을까?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비유로 엄청 말씀을 하신다. 그걸 뭐 당시의 문화가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유독 비유로 말씀을 많이 하신 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왜 비유로 설명하시느냐고 묻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설명하셨을까? 그건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을 해도 당시 유대인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나를 메시아로 보냈고, 너희는 나를 믿고 내가 말하는대로 살아야 돼'라고 말씀하셨으면,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친사람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지를 직구가 아닌 변화구로, 유대인들이 '이게 무슨 의미지?'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알아가게 만들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구약에선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당시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는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나?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들은 대부분이 설교인데 성경을 읽은 적 없는 사람들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는 표현과 언어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용하면서 그걸 심지어 강요할 때도 있다. 얼마나 폭력적인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과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기독이 아니라 개독이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커뮤니케이션 할 줄 모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무지몽매함과 지혜없음이다.

신학교에서는 현실과 상관 없는 이론적인 내용만 파는게 아니라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품고, 소통할 지를 연구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욕? 필요하면 할수도 있지. 그게 세상과 소통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리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길에 들어서서 그 길을 가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껍데기가 아니라 마음까지 옮겨질 수 있다면.

그걸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대중에 대한 신학적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내가 그쪽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들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느낌적으로 없을 것 같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조차 거의 본적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언제 내가 모이는 집단에 오라고 강요하셨나?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삶은 응집하고 사회적 권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이다. 그렇다면 우린 세상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지혜로워야 한다.

그런 와중에 찬양을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힙합은 안된다느니 하는 식의 얘기를 아직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에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건, 그런 꼰대질이 아직도 한국 교회 안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본질은 지키되 나머지는 무엇이든지 시대에 맞춰서 해도 된다. 아니, 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형식이 실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거기에 허용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걸 무조건 선을 긋고 여기는 안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왜 안되고, 또 왜 되는지를 고민하는게 우선이 아닐까? 그걸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교회의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 그게 오늘날 교회들의,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들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