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 아론이 송아지를 만든 것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저렇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과연 나는 달랐을까? 달랐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싶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성경도 없고, 예수님은 오시기 전이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 그리고 주위에는 이방신들이 넘실대던 시절. 하나님의 존재는 생각도,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백성들이 모세가 언제올지 모르니 우리를 이끄는 신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때 아론은 어쩌면 송아지 모형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상치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송아지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치고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인 것처럼 말이다.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줬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삼천명을 죽이게 하셨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을 마냥 좋은 분으로,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이를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이 시대에 사회와 국가가 현대사회만큼 형성되어 있고, 교육제도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도 받았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선택을 하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때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인 국가가 존재했다면 그들이 이렇게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고 다녔을 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겠지만, 이들이 광야에서 헤맬 수 있었다는 것은 역으로 그만큼 통제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사람을 지금보다 훨씬 쉽게 죽였을 것이다. 이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자신의 여동생을 범한 자들을 모두 죽인 것도 지금 기준이면 너무 잔혹하지만 이 당시에는 아마 서로가 생존을 죽이는게 지금보다 훨씬 덜 잔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생기기도 몇천년 전이고, 그렇다면 인간존중에 대한 인식이 덜한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죽이는 자가 강한 시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기게 하는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너무 잔혹하지 않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많은 기회를 주셨다. 애굽에서도 본인이 하나님됨을 증명하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에서도 그들을 먹이셨다. 수많은 기적으로 하나님은 이미 기회를 주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모세가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인간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언어와 관습에 맞게 소통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이때처럼 하나님께서 죽일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만 우리의 사회적 언어,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우리를 처벌하실 수는 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우상을, 형상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보이지 않아도, 형상이 없어도 믿기를 원하셨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으로 이럴 수밖에 없다라던지,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신다라는 식의 얘기를 한다. 그래도 돈이 중요하다는 말. 우리가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말. 맞다. 돈도 중요하고 노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게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돈, 사회적 지위, 권력, 명예를 아론이 송아지를 생각하듯이 생각하게 될 수 있으며 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걸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현대판 아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돈, 권력, 세상을 신뢰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풍요가 허락되는 것이 과연 꼭, 항상 하나님의 축복일까?
아니다. 그들이 그러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일 수도 있다. 하나님을 떠난 물질적 축복은 결국 그 끝에는 본인이 아니더라도 본인 자녀의 대에 가서는 멸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재벌가들 자녀들의 다툼이 항상 있는 것에서 우린 그것을 볼 수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자녀들에게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은 지를 고민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상하며 살아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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