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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두 글자로 보는 세상

목표

장래희망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서는 항상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다른 친구들은 대통령, 과학자 같은 것들을 쓰는데 나는 내가 쓴 장래희망 때문에 부모님께 연락이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래희망을 경비원이라고 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당시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친구들이랑 야구나 와리가리를 하면서 놀았는데, 우리는 항상 경비아저씨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나는 주차장에서 마음껏 야구와 와리가리를 하면서 놀고 싶었다. 

그때는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하라는 것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이가 한두 살 들어가면서 어렸을 때 장래희망을 쓰라고 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한편으로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만약 아이들이 순수하게 상상하게 해주면서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장래희망을 써보라고 하면 그게 잘못될 것은 없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것이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그 아이에게 장래 직업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듯해서 그게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나? 이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본인과 세상에 얼마나 아는가?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특정 직업을 쓰라고, 장래희망을 가지라고 하면 그건 사실 그 아이에게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장래희망을 강요하시는 쪽은 아니셨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서 연락을 하셨을 때도 부모님은 당황하고, 어처구니가 없어하시면서도 '이런 걸 해야지'라고 강요를 받았던 기억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장래희망이 계속 바뀌어나갔다. 현실을 알아가면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장래희망이 그렇게 자주 바뀌냐고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장래희망이 계속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면서 새로운 직업을, 자리를 찾아가지 않는가? 장래희망이 계속 바뀐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목표지향적인 삶

'과정'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장래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장래희망을 적게 하는 것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목표' 중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러한 교육이 우리나라의 지금과 같은 목표지향적인 문화를 만들어낸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고 달려갈 것을 강요 아닌 강요받는 듯한 것은 사실 아니던가? 

그런데 과연 우리 인생이 목표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든다. 우리는 미래에 있는 목표를 위해서 항상 현재를 희생하도록 교육을 받는 게 그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음주운전을 하고 나서 스스로 자수한 한 개그맨이 '난 인생의 목표가 누구나 알아보는 개그맨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걸 너무 일찍 이루고 나니 모든 게 허무해지더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그 기쁨과 쾌감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느라 현재를 포기하면서 산다. 또 사람들은, 세상은 그렇게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산 정상을 올랐을 때의 환희와 감격이 산 정상에 머무는 시간 동안만 지속되듯이,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것을 달성했다는 감격과 감동이 얼마 가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나만의 목표이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까지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에 따라 그 성취감에 취해 지내는 시간도 제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현재를 또다시 희생하면서 산다. 그렇게 해서 살면서 10번의 목표를 세우고 달성했다고 치자. 그렇게 해서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무려 1달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치자, 아니 조금 더 해서 그 이후에 자신이 목표를 달성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목표당 100일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는 한 가지 목표당 총 130일, 목표가 10개였으니 총 1300일을 행복하게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4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다. 평균수명을 80으로 잡았을 때 5%가 조금 안 되는 수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표를 10개나 달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한 달이나 지속되는 목표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달성한 목표를 보면서 행복하고 뿌듯해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와 현 상황을 비교하면서 우울해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최대치로 잡아도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는 것은 5%를 위해서 인생의 95%를 희생하면서 살게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정은 목표의 반대말

물론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인생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목표의 반대말은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목표가 아닌 과정을 중요시하면 우리의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과정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사실 우리 인생은 대부분이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한 기간을 감사하고 행복해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고 YOLO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인생에 있어서 '방향성'은 잡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향'성'과 목표가 다른 것은, 방향성을 갖고 간다면 중간에 다른 변수들을 만나게 되면 그 방향성은 틀 수가 있지만, 목표는 다른 변수들을 이겨내고 내가 지향하는 바를 달성해야 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성은 말 그대로 그러한 성향이나 경향을 의미하고 큰 틀을 의미기 때문에 조금 더 유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작은, 어긋나도 크게 상관이 없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우리가 과정 자체를 걸어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도구적인 측면에서 유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조금 더 과정 중심적으로, 과정을 목표로 삼는 삶을 추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조금 더 작은 것들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인생도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 아니던가. 우리가 무엇을 달성한들 이 세상을 떠나면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이지 그가 정확히 무엇을 달성한 사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 아닌가? 아니 사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보면 아인슈타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도 굉장히 많지 않겠나? 하물며 그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더 빨리 잊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살면 행복할지를 항상 고민하는데, 어쩌면 과정 중심적인 삶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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