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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말씀 묵상-2020년

욥기 1장 -5장 말씀 묵상

욥기에서 앞의 부분이 내겐 항상 의문이다. 사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생명만 건드리지 말고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그러하셨을까? 정말 하나님은 사탄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허용하셨을까?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의 부분이 내겐 항상 의문이다. 사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생명만 건드리지 말고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그러하셨을까? 정말 하나님은 사탄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허용하셨을까?

나는 이 부분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삽입한 부분으로,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처한 고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어나게 '허락'하신다는 것은 분명 그 부분과 맥락적으로 세밀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 부분이 아예 말도 안된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기도 하다. 우리 인생에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 고통의 순간들이, 유난히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찾아오지 않는가?

그런데 난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명해서, 사탄이 그렇게 하기로 해서 일어난다기 보다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 안에 있는 죄성 또는 악함으로 인해 일어나고, 자연이나 우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말 그대로 우연히, 자연이 스스로 돌아가게 하나님께서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탄과 얘기해서 '그래, 한 번 해봐라'라고 생각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개입하신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에 대해서 일정 부분 물음표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대부분의 것이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것에 미련과 의미를 두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내려놨다면 사실 그 순간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슨 일을 하실지, 이것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는데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폄하하거나 그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인간은 현실에서,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가족과 지인이 죽어서 우리가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기계지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약간 곁다리로 가자면, 개인적으로 지인이 죽었을 때 우리가 왜 힘들어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이 땅에 사는 것이 항상 좋고 행복한가? 특히 오랜기간동안 지병이 있었던 분들의 경우, 그 지병이 확실히 치유될 수 있지 않은 이상 이 땅에서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이 땅을, 우린 언젠가 떠나게 되어 있는데 그걸 떠나게 된게 나쁜 일일까?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항상 그렇게 행복하고 좋기만 한가?

내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난 때때로 차라리 죽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고생, 고통, 고난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 또는 못한 것은 사실 가족 때문이었다.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나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 하실까, 그들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다.

이 땅에서 사는게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실 떠난 사람은 이미 떠난 것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기독교인이라면 이 땅의 구속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 좋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상실감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세상을 떠나서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며 공감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 그 상실감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이고 그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매우 인간적인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런 고통 가운데 단순히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을 들여다보고 이 땅이 존재하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고통을 왜 느끼는가? 하나님께서 고통을,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경험해야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내려놓음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그렇게 깨닫고 내려놨을 때야 비로소 이 땅에서 더 자유롭게, 그리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으로 누리다 이 땅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잡으려고 발버둥 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 것인가?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잡고 갖는다 하더라도 그 후에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욕망할 것이라는데 있다. 그 과정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고통을 반복하다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진정한 자유함에서 온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면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함으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인간은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고, 그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인간을 전제로 한다. 욥기는 그것을 보여주는 책이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시험해 보는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