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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말씀 묵상-2020년

마태복음 10-12장 말씀 묵상

I am sending you out like sheep among wolves. 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All men will hate you because of me, but he who stands firm to the end will be saved. When you are persecuted in one place, flee to another.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finish going through the cities of Israel before the Son of Man comes... Do not be afraid of those who kill the body but cannot kill the soul. Rather, be afraid of the One who can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마태복음 10장 16,22-23절, 28절)

예수님은 세상에서 지혜로우라고 하신다. 세상에는 늑대들이 있고 우린 양과 같으니. 그래서 그 안에서 지혜로워야 한다고 한다.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한 적이 없으셨다. 그 안에서 지혜롭게 잘 버티라고, 말 그대로 버티라고 하신다. stand firm to the end라는 것이 이를 보여주고, to the end는 중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은 결국 세상 앞에서 무릎 꿇고 무너질 것이란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무 많은 이들은 이 부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자신이 받는 것을 다 핍박이라고 여기고, 세상이 자신을 핍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우린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성경적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성격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 욕심, 욕망에 붙들려서 살아놓고 그에 대한 반사작용에 대해 '내가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하니 나를 핍박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신이 하나님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그렇다고 치자.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믿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걸 그렇게 고래고래 외치고 입 밖으로 욕 같은 말을 쏟아내고 폭력을 휘두르며 이웃에 피해를 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뱀 같이 지혜로워라'는 말에 합당할까? 아니다. 뱀 같이 지혜로우려면 상대를 읽어내야 한다. 상대가 어떤 맥락에서 왜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는 지를 읽어내고 그것이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이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무조건 입 밖으로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성경적으로 정당화 되기 힘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마음과 영혼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죽이려 드는 자가 아니라 영과 마음을 망가뜨리려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는 우리가 항상 우리의 마음과 영을 돌아보고 마음과 영이 제대로 서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For I have come to turn " 'a man against his father,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own household.'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마태복음 10장 34-39절)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셨고, 이 내용을 그대로 읽으면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 오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말씀의 전제가 있다. 그건 이 땅이, 이 세상이 악하고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현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이 당시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는 그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세우기 위한 작업은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세상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세울 때 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때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으란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부분들이 이단에게 가장 많이 이용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에 비춰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신천지 같은 조직을 만드셨나? 자신만이 옳은 것이라며 사람들을 자신의 집단으로 끌고 오라고 하셨나? 예수님이 너희 가족을 떠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고 헌금을 내라고 하셨나?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저 씨앗을 뿌리고 가셨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비판하고 흔들어 놓으셨지만 세상에서, 정치적으로난 국가적으로 뭔가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세우고 힘을 갖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그러시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성경은 항상 '마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생각은 맥락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아무것도 심지 않으셨다. 그저 제자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고 가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인위적으로 끌어모으고 조직화 하지도 않으셨다. 기독교인으로 사는게 작은 예수로 사는 것이 목표인 삶이라면,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삶을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 목표이면 충분하지 뭔가를 조직화 하고 키워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 그건 마치 한 가족 안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성을 쌓고 독립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하나님 것인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을 쌓는게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나? 이미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가족을 말씀하시는 건, 가족이 가장 긴밀하고 친밀한 사회의 단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조건 가족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말하는 가치와 하나님께 속한 가치가 충돌되면, 하나님의 가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갖고 집을 떠나라고 하는 이단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건 마음과 신앙적으로 독립하라는 것이지 물리적으로 가족을 떠나라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만약 그렇게 따나는 것이 목표라면 하나님이 왜 분란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셨겠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일단 함께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이단들은 물리적으로 가족을 버리고, 떠나라고도 하는걸까? 그건 그들이 이단이기 때문이다.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Christ was doing, he sent his disciples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I tell you the truth: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마태복음 11장 2-3, 11절)

이 부분이 처음으로 신기하고 충격적이게 다가왔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이 그 분이 맞냐고 묻는다. 세례요한이 누군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례를 하지 않으려던 자다. 그때 그렇게 확신이 있던 그도 투옥된 상황에서는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만한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하셨다. 그런 세례요한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건 어쩌면 세례요한도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세우고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반대로, 그렇게 대단한 세례요한도 그걸 제대로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세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믿음 있음의 증빙이다. 세례요한이 이를 묻는 것은 자신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잘못 알 수 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철저히 자신의 능력, 실력, 지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심을 계속 의심했고 본인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자세를 견지했다. 지금껏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예수님께서 평가하신 세례요한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얼마든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알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를 반복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 질문을 했다. 

너무 확신에 찬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 그건 자신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우린 항상 고민하고, 기도하며 내가 맞는지에 대해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But when the Pharisees heard this, they said, 'It is only by Beelzebub, the prince of demons, that this fellow drives out demons.'...Then some of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the law said to him, 'Teacher, we want to see a miraculous sign from you.' He answered, 'A wicked and adulterous generation asks for a miraculous sign! But none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마태복음 12장 24, 38-39절)

 

유대인의 리더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사탄이 한 것으로 본다.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의 기존에서 이해되거나 해석되지 않는 기적을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내용은 그게 믿음과 신앙의 핵심이 아니고 기적적인 것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단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야단치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고 계셨다. 기적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다 있는 그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게 응답된다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린 모르지만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더 좋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증거로 보고, 듣는다고 더 확실히 믿지 않는다. 이는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라고 하신다. 치열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을. 그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