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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말씀 묵상-2020년

요한복음 10-12장 말씀 묵상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All who ever came before me we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 not listen to them.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He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요한복음 10장 7-10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가 있었지만 그건 무형의 무엇인가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다른 종교들이 전제하고 있는 신과 유대인들이 믿는 신이 다르다고 볼 근거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만든, 주관하는 무엇 혹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현실을 해석하며 살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달랐다. 양들을 이끄는 목자처럼, 예수님께서는 방향성을 제시하셨고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다. 기독교 혹은 개신교에서 예수님께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존 유대교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셨고, 그 핵심에는 사실 '자유함'이 있다. 그 자유함은 이 땅의 것에서 자유함이다. 이 땅의 것에 구속되지 않는 것, 죽음과 이 땅의 삶에서 내가 욕심내게 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 자유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고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기준이 되었다.

이는 율법주의적이 되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려온 유대인들의 종교와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것이 본질적이지는 않고, 그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 기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예수님이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게서 그런 기존의 종교와 대립각을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당시 유대교와 같은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겉으로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맨 얼굴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한국 땅에 오신다면 한국교회들과 대립각을 세우시지 않을까?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back to Judea.' 'But Rabbi,' they said, 'a short while ago the Jews tried to stone you, and yet you are going back there?' Jesus answered, "Are there not twelve hours of daylight? A man who walks by day will not stumble, for he sees by this world's light. It is when he walks by night that he stumbles, for he has no light.'......Then Jesus told them, 'You are going to have the light just a little while longer. Walk while you have the light, before darkness overtakes you. The man who walks in the dark does not know where he is going. (요한복음 11장 7-10절 / 12장 35절)

제자들은 나사로에게 가겠다는 예수님을 말리려 하셨다. 그 이유도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했다. 예수님을 잡아 넣으려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멍청하고 이상한 짓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빛,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은 지금이 나사로에게 가야 할 때임을 아셨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었다. 다른 세상의 조건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실 것임을 믿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담하게 나사로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달리신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자극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셨다면, 나사로를 살리지 않으셨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치를 보느라고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죽어 있던 나사로가 살아난 일은 그들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결국 자신들의 지위를 잃는 것에 대한 것임을 요한복음은 보여준다. 

기독교인은, 작은예수로 산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빛을 보고 가는 것이다. 남들은 위험하다고 해도, 수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라고 하시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가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어야 한다. 

우리가 실수하고, 착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도하심이라고. 하지만 그 길을 가면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붙든다면, 하나님은 그 실수 또한 사용하실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가면 된다. 하나님은 또 피할 길을 내실테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이다. 그리고 바울이 나를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매일을 살 수 있단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Then Jesus cried out, 'When a man believes in me, he does not believe in me only, but in the one who sent me. 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 I have come into the world as a light, so that no one who believes in me should stay in darkness. (요한복음 12장 44-46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본인이 기준점으로 세워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해주셨던 '빛'으로 자신을 비유하면서 본인을 따라 사는 것이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나라를, 질서를 이 땅에 세우는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우리는, 그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 순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간주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