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refuse to speak to me?" Pilate said. "Don't you realize I have power either to free you or to crucify you?" Jesus answered, 'You would have no power over me if it were not given to you from above. Therefore the one who handed me over to you is guilty of a greater sin.' (요한복음 19장 10-11절)
예수님께서는 억울하실만한 상황에 계셨다. 그도 그걸 알았고 빌라도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회피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능하면 이 잔을 내 앞에서 치워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겠다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자신이 가야하는 길을. 이 말을 하는 중에서도 인간이신 예수님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자신에게 맡기신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가셨다.
우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어떠한가? 작은 예수로 사는게 기독교인의 목표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Thomas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Then Jesus told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you have believe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요한복음 20장 28-29절)
예수님을 본 자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마는 심지어 직접 만지지 않고도 믿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약 2천년이 된 지금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건 지극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기적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믿냐고, 성경을 읽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단 말이 어쩌면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Then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As soon as Simon Peter heard him say, 'It is the Lord,' he wrapped his outer garment around him (for he had taken it off) and jumped into the water......Jesus said to them, 'Bring some of the fish you have just caught.'......Peter turned and saw that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was following them. (This was the one who had leaned back against Jesus at the supper and had said, 'Lord, who is going to betray you?') (요한복음 21장 7, 10, 20절)
7절을 읽으면서 울컥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베드로'라니... 예수님을 3번 배신한 그에게 사랑한 자라니.. 그러다 20절에 보면 이 부분이 대놓고 '얘가 이런 애야'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
그런데 그 뿐인가? 이는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도 쓰인다. 다른 제자들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밝히거나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참 지키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진 아니어도 자신을 그렇게 따르더니 자신을 부인한 이들까지 품으셨다. 사실 이런 사람은 원수보다 더 미울 수 있다. 원수는 그냥 원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먹이고, 가르치고, 아낀 자들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배신감이 타오를 법도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주셨다. 사실 내가 사랑했던만큼 더 배신감이 클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냥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품으셨다. 이는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으셨을까? 그건 아마 그들의 배경, 특징과 한계, 성향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한계를 어느 정도는, 다른 영역에서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품을 수 있으셨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같은 원리다. 원수도 사람이고,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든지 나를 원수로 여기고 내게 원수가 되었지만 그 또한 어딘가에서는 상처를 받거나 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거나 피해를 준 것일 것이다. 그의 그런 면들을 이해하면, 나도 한계를 갖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를 용납까지는 하기 힘들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내가 만약 이 땅의 것에서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진짜 다 내려놓은 상태라면, 내게 원수라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고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원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닌가? 나의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했을 때, 내 무엇인가를 빼앗아 갔을 때 원수가 된다. 그런데 원수가 내게 피해를 주거나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 땅의 것에서 자유하다면, 그건 내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단 의미다.
그런 수준의 믿음과 신앙을 갖는 것은 나의 함으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온전히 하나님 안에 거한다면 가능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님 안에 거하다 잠시 빠져나오면 분노하게 되는, 내가 계속 하나님 안에 거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사랑이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살기 위해 하루, 하루를 노력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다시 품으시면서 그것을 실천하셨다. 제자들이 사도행전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사랑을, 원수도 용서하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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