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사람들은 본인이 힘들면, 힘든 상황에 있으면 그걸 그냥 광야의 시간이라 말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힘든 것과 다르다. 이는 '힘들다'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그에 따라 사실 힘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광야]는 객관적인 시간 혹은 상황이다.
내가 생각하는 광야의 시간은 내가 뭘 해도 인생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 시간이다. 정말 최선을 다해도 인생이 앞으로 가지 않고, 뭘해도 안되며, 주위에서는 네가 뭔가를 잘못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척만 하고 안하는게 아니냐고 말하는 시간. 너무 억울해도, 내 몸이 부서지고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노력해도 내 인생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길이 막히는 시간. 그게, 광야의 시간이다.
광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내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모래바람에 온 몸으로 고통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들이 즐거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 이게 인간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닌가? 광야의 시간을 버티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들이 축복인 이유는 하나님은 아무나 광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인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을 그 안으로 들여보내신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시간동안 만큼은 내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때로는 기절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먹이고, 살리신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아무것도 없기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하나님과 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정말 가깝고 친한 사람들마저도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
반면에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은 조금 다르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하기 쉽지 않고, 나의 마음은 널뛰며,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이 명확히 느껴지기 힘들다. 이는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나의 노력과 힘으로 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는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롯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시면 단 둘이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하시겠나? 광야의 시간은 그렇게 오롯이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광야를 들어갈 때와 광야를 나설 때 그 사람은 외적인 조건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과 하나님만 인지하는, 그리고 어쩌면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미세하게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있다.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세상으로 나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은 아니다. 그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그 사람이 광야에서 살아냈던 삶의 패턴을 더 철저하게 살아낼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식사를 조절하고 운동하지 않으면 살이 찌듯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 마음의, 영의 훈련을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바로 서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시간이 축복인 것은, 그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온 몸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느 것을 익히고, 삶을 그렇게 살아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내가 흔들리고 방황하려는 시점에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낸 기억은 내가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의 광야의 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책 형태로 인쇄해서 갖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광야의 시간'이라고 해놨는데, 난 그 시작점을 로스쿨 입학으로 잡고 있다.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로스쿨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때는 내 힘과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변호사시험이 끝난 이후였다. 그 전까지 나는 내 힘과 노력으로 뭔가를 이뤄내려 했고,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버틸만했다.
나의 광야의 시간은 2014년 변호사시험 합격자 발표 이후였을 것이다. 구글에서 인턴을 하고, 팟게스트를 하면서 박사과정에 들어간 그때부터 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방황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하고 정한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지는 상황과 일을 쳐내면서 살아냈다. 내가 노력하고 지원한 것들은, 될 법한 것들은 모두 안됐고, 예상하지 못했거나 안될 법한 것들은 되는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작년 연말부터 모래바람 사이,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는 그 모래바람을 가르며,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나갔고, 이젠 그 마을입구에, 그 마을을 외부로부터 막고 있는 성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때부턴 수많은 유혹이 있을 것이고, 난 그 안에서도 광야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보호로 받으며 살던 삶을 그대로,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찾으며, 모든 결정을 그 안에서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난 실수하고, 세상적으로는 실패도 할 것이다. 힘들 것이고, 때로는 그 안에서 넘어지며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때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간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다시 일어나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걸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 것이다.
내가 그렇게 다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서야 진정으로 마음으로 세상의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라던 마음은 과거보다 많이 희석되었음을 느낀다. 그 깨달음도, 다짐도 수도 없이 흔들리겠지만 광야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그때마다 내가 내 자신을 다잡을 수 있게 해줄 것을 나는 믿는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축복인 것은 이 때문이다. 진리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를 입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보고 싶은 마음과 용기가 생기기 때문에. 광야에서의 시간은, 그래서 축복이다.
그 축복을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지만, 내 인생이 앞으로 가고 있지 않다면,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글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잘 버티고 몸부림치다보면, 그 끝은 있고, 보이더라. 하나님은 그렇게 보호하고 우리를 이끄시더라. 그 하나님을 믿는 힘. 그게 믿음이고 신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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