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모태신앙'이란 표현을 써야 할 때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난 그 개념부터 잘못됐고, 그 표현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망치는 역할을 한 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이 어디있나? 어머니 태 속에서부터 내 믿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이고, 내 신앙은 나의 신앙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중 적지 않은 이들이 몇 대째 기독교, 모태신앙 같은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거기에서부터 그 사람의 신앙성장은 끝이 난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간 그걸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기독교인으로 '남았'다. 다른 종교들도 들여다 봤다. 다신교는 일단 말이 안되니 기본적으로 패스했다. 이 세상이 여러 신이 경쟁적으로 존재한다면 지금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될까? 불가능하다. 그러면 남는 건 기독교 (신교/구교), 유대교, 이슬람 정도다. 불교? 불교도 들여다 봤지만 내게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세와 거리를 둬야 한다면 신은 이 세상을 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패스.
남은 종교들을 분류해 내는 기준은 어렵지 않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무함마드가 절대적인 선지자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예수님은 분명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는 둘 중에 하나다. 정신병자든지 진짜 메시아든지. 그런데 그는 미쳤다고 하기엔 너무 맞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렇게 유대교와 이슬람 아웃.
남은건 천주교와 개신교인데. 이 부분은 까미노를 걸을 때까지 정리가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까미노를 걸으면서 미사를 다 드렸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한국 신부님과도. 그리고 까미노에서의 경험과 대화는 날 개신교 신자로 남게 만들었다.
20대에 머리로 정리된 내용은 30대에 힘든 시간을 보내며 혼돈과 카오스의 세계를 오가게 된다. 아 일단, 난 신학서적들을 한때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읽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말 관심이 가는 것들만 선별적으로 읽는다. 그 이유는 [진리는 단순하다]는 나의 철저한 신념 때문이다. 내가 신이라면 진리를 뭔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공부하고 고민하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럴 수 있는 상황과 능력을 주셨을텐데 대부분 사람은 그럴 여유도 없고 능력도 안된다. 그래서 난 교파, 교리 복잡한거, 어느 순간부터 놨고 잘 모른다. 관심이 없다.
사실 30대의 난 '정말 신이 있다면 이 땅에서 왜...'란 질문을 거의 모든 일에 하며 살았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개신교가 맞을 것 같긴한데, 머리로는 그게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내게 박사과정은 법을 공부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과 패턴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수험법학이 아니라 학문으로써 법학, 특히 헌법학은 사람, 사회, 국가에 대한 고민을 파고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근대헌법의 시작점은 종교개혁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공기처럼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생기지도 않았을 개념이다. 이는 내가 헌법에서 학문적으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관련 내용을 공부했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지점이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느낌표로 바꿔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시는 걸까? 성경은 그렇게 사랑, 사랑 거리는데 사랑이란 무엇이고 진짜 사랑을 하면 상대에게 어떻게 대할까?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까?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에서의 사랑은 '자유'로 나타난다. 상대를 정말 사랑한다면 우린 그에게 자유를 허락할 것이다. 자유가 사랑인 것은, 자유는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게 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랑의 일환이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선택할 수 있게 해주냐고? 그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신뢰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넘어지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욕구와 욕망에 넘어져도 우리가 다시 우리 힘으로 일어나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신뢰하신다. 생각해보자. 당신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매일 바람을 피워도, 상대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나? 하나님은, 그러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자유를 허락하실까? 이는 진짜 사랑은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직접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것,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이와 관련해서 난 한때 내 자유의지로 자유를 내려놓겠다느니, 자유를 내려놓을 자유가 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건 다 헛소리다. 우린 자유롭게,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선택권을 주신다. 우리를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선택권을 갖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정말 절대자라면, 예수님을 보낸 신이라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원리가 승리해야 한다'였다.
그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보자. 인류역사를 보자. 인류 역사는 놀랍게도 구속되고 종되는 제도와 틀에서 점점 자유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있고 흔들리기도 하고 문제도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역사적으로 점점 자유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더라.
다만, 그 과정에서 자유를 둘러싼 또다른 부작용도 발생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한다는데 있다. 자유는 기준점이 있어야 진정한 자유일 수 있다. 아무 기준도 없이 막하는 것, 모든 것은 지멋대로 하라는 것은 자유도, 자유주의도 아니고 방종이자 해체주의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을 수는 없지 않나? 그건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그 기준은 무엇일까?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평화를 이루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기존 질서를 모두 깨셨고, 그 이후에는 제자들이 세상에 만든 틀을 깨면서 복음을 전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그러한 기준점은 '인간 본성'이 될 것이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기독교만큼, 성경만큼 인간 본성에 대해 솔직하게, 잘 보여주는 경전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는 수행을 통해, 명성을 통해 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명확하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그 이유도 제시된다.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 수많은 생각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은 선한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기에 그 논의가 크게 효용성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게 효용성이 있는 지점은 딱 하나가 있다면 그건 성경이 맞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선하게 만들어졌으나 죄성이 생겼다. 이는 성선설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성선설이 맞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해야 한다. 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데, 생각해보면 인간이 백지 상태로 태어나거나 악하게 태어나면 인간은 선할 수가 없다. 이는 이미 악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한 것은 세상에서 그 사람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선하다. 이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이, 선함이 악함에 우선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런 고민과 생각들을 복잡하게 하고, 내 삶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내가 기독교인으로 남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을 [숭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어떤 존재도 [숭배]할 대상이 아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안에서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 내용이 없다.
혹자는 제사는 무엇이냐고 물어볼텐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제사와 율법이 그들을 절대자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뭐가 있었나? 구약시대니까 그때는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도 없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식할 수 있는 수단은, 제사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시고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게 된 것도 그 맥락에서 설명이 된다. 예수님은 기준이 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현실에서 다양한 의식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가면 되게 됐다.
내게 성경은 세상에 대한 설명서다. 하나님께서 본인이 만든 세상을 너희는 이런 존재고, 세상은 이래서 이렇고,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너희는 이렇게 해야 진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져, 진짜 중요한건 이거야, 라고 하나님께서 써주신 세상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설명서다. 그 설명서를 읽고, 고민하면서 세상을 분석해 보니 그 내용이 맞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난 기독교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설명서의 원리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way of life를 성경에서 설명하는대로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숭배하듯 이것달라, 저것달라면서 요구를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잘 숭배하면 좋은걸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이 땅에서 원죄로 인해 망가진 영역들에 질서를 회복하는 것. 그게 성경에 있는 전부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 인생은 우리를 계획하고 만드신 분이 써놓은 설명서에 따라 살 때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도 다 다르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계획을 심어 놓으셨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은 모두 비슷한 것을 추구하고 비슷한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풍요로움, 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실은 방종이지만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는) 자유.
그런데 정말 물질적 풍요로움이, 돈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물론, 일정 부분은 그런 것이 사실이고 궁핍하면서도 행복하고 마냥 기쁘기는 쉽지 않다 (쉽지 않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인간이 무조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그 기준으로 따지면 재벌은 고민도 없고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줄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이다. 물질은 마치 조미료와 같은 것이다. 먹는 그 순간에는 맛있는 것 같지만 곧 입이 마르고, 재료 본질의 맛은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조미료. 그게 필요한 순간은 있지만 조미료만 계속 먹으면 그 사람의 혀가 진짜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듯이 우리가 물질만을 추구하다보면 진리를, 인간 본연의 모습과 본질을 잃고 잊게 된다.
사람들은 사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을 벌고 싶어하고 집을 사고 싶어한다. 그런데 잠시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연봉이 수억대인 사람들 외 다른 사람들은 비이성적이어야 영끌까지 하면서 집을 사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게 된다. 이는 내가 받는 연봉에서 지출을 빼고 일할 수 있는 연한을 곱해보면 답이 대충 나온다. 그리고 내 연봉이 아무리 올라가도 그게 달라지지 않는건, 내 연봉이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쓸 곳이 보이기 때문에 연봉이 올라가면 저축보다는 지출규모가 더 빠르게 늘어난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그리고 미래는 예측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년에 짤리 수도 있고, 직장이 한순간에 없어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 지점을 보완하기 위해 우린 국가를 만들고 보험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기독교에선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시나? [전지전능]하다고 하신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대놓고 내가 저기 나는 새도 먹이는데 너희를 굶기겠냐고 하신다. 정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왜 두려워하는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그래서 기다리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계심을 느낄 수 있는 접점과 경험들을 하게 하신다. 그 가장 극단적인 영역이 광야다. 하나님만 보게 하시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접점을 주셔도 우리가 그게 접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세상에 물들고 세상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는 누군가를 정말 안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선, 그 사람이 말하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과 자주 연락하고 그 사람의 현상황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한국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주 만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기를 기대하거나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준 설명서를 읽지도 않으면서,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원망한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건 설명서를 읽지 않고 기계를 작동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의 관점과 가치는 하나님이 만든 관점과 가치와 완전히 다르다. 그 가치는 상반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과 가치로 살고 세상을 보다가 성경적 관점과 가치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는 논쟁은 가장 멍청하고 쓸모 없는 이유는 진짜로 믿으면 행위는 바뀌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선한행위를 한다고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있는데 선한행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선한행위를 하다 믿게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바뀔 수밖에 없단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과 부딪히고 핍박을 당할 것이라 했다. 세상이 너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이는 관점과 기준,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얘기했지만 누군들 항상, 완전히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힘과 노력으로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경은 그것도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담배는 왜 피우는가? 스트레스를 받아서다. 스트레스를 왜 받나? 고민이 있어서다. 고민이 있다면 하나님을 먼저 찾나? 담배를 먼저찾나? 술도 마찬가지다.
혼전순결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성행위 자체가 문제가 될 것도 아니고, 그게 신성시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다른 스킨십과 달리 성행위는 생명이 잉태될 수 있고, 최소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무리 성적으로 개방적인 여성이어도 항상 어느 정도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들어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상대가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에서 행위를 강제하는게 사랑인가? 상대가 선택할 수 있게, 자유를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세상에서 이런저런 말을 듣지 않고 진공상태라면, 정말 상대와 나만 있다면 여성이 가정 밖에서 성행위를 하게 될까? 남자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면 아마 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하면 그로 인해 치뤄야하는 대가가,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이처럼 혼전순결은 사랑, 두려움, 마음의 맥락에서 설명해야지 행위를 기준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두 사람이 다 기꺼이, 마음에 꺼리낌이 없고 예상하지 못한 부수적인 효과(?)가 나오더라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면 결혼 전이냐 후냐는 사실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괜찮고 기꺼이 임하는 것이냐가 문제지.
이와 같은 수단이 우리를 잡아먹거나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수단들이 수단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그걸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행동과 생각, 기준이 왜 그러하는 지를 생각하고 면밀하게 살펴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피곤하고 어려울 수 있다. 처음에는.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온전한 평안함과 은혜를 맛볼수록, 우린 기꺼이 그렇게 하게 된다. 그 안에 진짜 자유가, 지속가능한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서 기꺼이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하듯이, 그런 평안함과 은혜를 맛보면 그 안에 거하기 위해 기꺼이 그런 노력을 한단 것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왜 기독교인으로 남았냐고? 진짜 마음의 평안과 안정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에 있는 내용을 믿고 따를 때 누릴 수 있고, 그때 내가 진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서 기독교인으로 남기로 했다.
ps.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굳이 이단에 빠질 이유가 없다. 이단에서 짜깁기로 끼워맞추는 성경해석이 잘못된 것이란 것은 그들과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그들이 강요하는 행위들은 반자유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랑이 아닌 점령과 구속을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성경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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