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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0년 봄, 제주

제주에 살고 싶진 않아요.

제주에 살고 싶진 않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제주에 처음 몇 번 내려올 때는 제주에 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살고 싶었다. 2011년에 내려와서 게스트하우스(이하 '게하')에 묵었을 때는 서울에서 내려온 게하 주인의 삶이 부러웠고 서울로 돌아가서 몇 주 동안은 제주 부동산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간 제주 앓이를 했다.

내가 제주에 자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내려오게 된 데는 사실 지인들의 영향이 컸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제주에 내려가는 지인들의 페북 포스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자주 가지?'라던 생각이 나도 거의 정기적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자주 갈 수 있으면 좋겠다'로 변했다. 그중에는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몇 년이 그렇게 지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제주에 자주 내려오던 사람들은 더 이상 제주를 자주 찾지 않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제주가 변하는 모습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제주에서 더 이상 볼 게 없을 수도 있고, 더 좋고 새로운 장소를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뭔가에 강하게 꽂혔던 마음이, 흥미가 어느 순간 떨어지기 시작한 듯하다. 일 년에 한 계절씩, 제주의 다른 모습을 동서남북 한쪽씩 보면 길어야 4년, 총 16번이면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볼 건 없을 테니까.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의 경우, 제주가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제주의 모습은 그들의 삶에서 희석되는 것을 발견했다. 제주의 여러 모습이 좋아서, 흠뻑 빠져서 내려왔지만 그 공간이 일상이 되는 순간 그들이 사모하고 환호했던 제주는 사라져 가고 그 공간을 서울의 하루하루를 채우던 제주의 일상이 그들의 삶을 채워가는 것을 봤다.

너무 자주도 아니지만, 꾸준히 제주에 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질리지 않고 싶어서. 하지만 제주에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좋아라 하고 아끼는 제주을 잃기 싫기 때문이다. 팍팍한 일상 속에, 제주마저 없다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숨을 쉴 통로가 사라지게 될 텐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해외에 나가서 다른 장소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매우 현실적으로 그러기엔 금전적인 변수가 너무 크기도 하고 쉬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는 새롭고 말이 안 통하는 곳보다 익숙하고 편하며 말이 통하는 곳이 낫더라.

그렇다면 육지에서 찾으면 되지 않냐고? 그러기엔 내가 비행기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오롯이 혼자 있는 느낌을 너무 좋아한다. 이렇게 까다롭게 퍼즐을 맞춰보면, 결론은 항상 제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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