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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0년 봄, 제주

겨울에는 제주죠

5-6년 간 매년 제주를 연 1회는 내려가면서도 성수기에는 간 적이 없다. 그나마 성수기에 가까웠던 것은 6월 중순 정도?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거의 항상 1월에 시간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제주의 기억은 거의 겨울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 회사들은 이상할 정도로 여름에 휴가를 가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서 모든 휴가지가 여름이 성수기이지만, 사실 난 제주의 겨울이 더 좋다. 겨울의 제주는 서울을 포함한 육지보다 따뜻해서 패딩으로 꽁꽁 싸매고 있지 않아도 되고, 렌터카와 숙박비도 여름보다 저렴하고, 심지어 맛집들도 줄이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에서는 기다리기엔 너무 줄이 긴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비수기'로 분류되는 시기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외에도 '객관적으로' 제주의 겨울이 갖는 매력도 적지 않다. 곳곳에서 보이는 동백꽃과 주렁주렁 달려 있는 귤, 제철을 맞아 '이게 당근을 간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단맛이 강한 제주의 당근주스까지. 제주의 겨울은 다른 계절에 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안고 있다. 그래서인지 난 제주에 내려갔을 때 귤을 거의 사 먹은 적이 없다. 게스트하우스나 가게에 가면 팔기에는 상품성이 없지만 맛은 똑같은 귤을 한 주먹씩 주더라.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귤을 한동안 먹지 못할 수준으로 꾸준히 계속 먹으면서 다녔다.

차 반납하기 직전에 남은 귤들. 저 공간에 귤이 가장 적을 때 사진이다. 귤을 사 먹은 적은 없다.

이처럼 겨울에 제주에 가야 하는, 겨울의 제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내가 겨울의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 엄청난 공간감이다. 사람들이 없고, 나 혼자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공간감. 그리고 북적이지 않는 차도. 사실 이번에 제주에 내려가서 비자림로에 나무들이 베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화도 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제주의 모습이, 제주의 자연이 파헤쳐진 듯한 느낌이어서 말이다.

그리고 사실 주로 겨울에 제주에 가는 내 입장에서는 그 길을 왜 넓히려고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단 한 번도 그 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득 성수기에는, 여름에는 조금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 그 길이 겨울에도 가끔씩은 밀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름에는 더 많이, 자주 밀리겠더라.

하지만 겨울의 제주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다. 해안도로에서 시속 30-40km로 달려도 앞이나 뒤에서 오는 차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빨리 가려는 차를 먼저 보내주고 나면 꽤나 긴 시간 동안 그 속도로 그대로 드라이브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만 오지 않는다면 겨울의 제주도 창문을 살짝 열고 다닐 수 있을 수준의 날씨는 된다. 여름에는 오히려 창문을 열고 다니면 햇볕이 따갑고 덥지 않을까?

'놀러 가는' 제주는 여름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겨울에는 사실 문을 닫는 시설도 있고, 운영을 더 짧게 하는 곳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쉬러 가는' 제주는 분명 겨울이 좋다. 제주에 오는 사람들이 조금 줄어서인지, 아니면 겨울이라 손님이 조금 적어서인지, 예전에 항상 웨이팅이 길던 풍림 다방도 이번에는 두 번을 방문했을 때 웨이팅을 받고 곧바로 들어가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제주에 계시는 분들은 또 제주의 가을이 그렇게 좋다고 하시더라. 사실 어느 계절인들 제주가 매력이 없겠나? 사계절마다 그 색이 또 다르겠지.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울의 제주는 느리고, 그 느림이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숨 쉬기 위해, 살고 싶을 때 제주를 내려가는 내겐 겨울의 제주가 가장 좋다.

내 눈 앞에서 100% 당근만 갈아서 만든 주스가 저 색에 설탕 같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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