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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0년 봄, 제주

제주 여행의 방법들

나의 첫 제주 여행은 자전거 일주였다. 학부 1학년 때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겠다며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에서 타던 자전거를 타고 완도까지 가서, 배를 타고 들어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제주에서 자전거만 죽도록 타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나왔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게 과연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항상 있다.

어떤 분들은 '제주는 000으로 여행해야지'라고 못을 박아버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주로 떠난 이유와 제주에서 누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여행 방법을 달리하면 되는 것이지 제주여행에 정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렌터카, 공공버스, 도보 등의 방법으로 제주를 여행해 봤지만, 내가 경험한 제주여행은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렌터카는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이동할 자유를 주고, 공공버스는 천천히 움직일 수 있는 자유와 여유를 주며, 도보여행은 주위에 있는 풍경들을 디테일하게 눈과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 주더라.

개인적으로는, 제주는 여러 번 찾으면서 한 번 갈 때마다 세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해 보는 것이 그다음에 제주를 찾았을 때의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함덕에서 종달리 사이에 있는 해안도로에서 천천히 드라이브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번에 어쩌다 보니 그 구간을 무려 3번이나 천천히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재작년에 도보로 그 구간을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더라. 내가 힘들어서 머물렀던 카페, 비가 쏟아져서 한 시간 넘게 멍 때리고 앉아있어야 했던 처마, 끝내 도저히 안 되겠어서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들어갔던 마을까지.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그때 내가 했던 생각과 가졌던 마음들이 되살아났고, 그 과정에서 혼자서 뭉클해지기도 했다.

재작년에 내가 비를 피하기 위해 한 시간 동안 멍 때리고 있었던 건물.

이처럼 제주를 다양한 방법으로 여행해보면, 과거에 그곳을 여행했던 '나'와 현재의 '나'가 겹치면서 그 과정에서 내 현재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향이 서울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고향이 없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나는 고향을 찾았을 때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기분으로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마음의 고향을 그곳에 만들면서 말이다. 거기다 내가 숨 쉬고 살고 싶을 때 주로 제주를 찾다 보니, 그런 장소들을 마주할 때면 예전에 내가 힘들 때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힘들었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그래도 나이가 드는 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예전에도 렌터카를 빌려서 제주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이번 여행이 조금 특별했던 것은 '전기자동차'를 빌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전기자동차가 뭐 그렇게 큰 변화를 가져오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도 사실 전기자동차라는 변수가 여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런데 어쨌든 한 시간 전후로 충전을 시켜야 하는 상황은 내가 조금 더 여유 있게 쉴 수 있는 핑계를 주고, 렌터카 업체에서 충전카드를 비용을 지불하고 실질적으로 전기값(?)을 사전에 지불하다 보니 반납할 때 처음에 빌릴 때 연료량을 채울 필요가 없다 보니 여행 막바지에 내가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더라. 거기에 운전을 오래 해도 '내가 차를 운전을 오래 하는 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아'라는 생각까지 들어 여행하는 내내 다른 때보다 조금은 더 편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자동차를 충전시키는 동안 나도 여유롭게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정답도, 정석도 없다. 다만 여행의 목적에 따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여행 방법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때로는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그 목적을 충족시켜주지만 또 어쩔 때는 예전에 가봤던 곳 또는 추억이 있는 곳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 그 시점에 여행의 필요를 충족시켜준다. 어떤 이들은 '여행 가는 데까지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잘 돌아와서 다시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함임을 감안하면 어떻게 하면 여행의 목적을 충족시킬지를 고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나의 일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에 그런 고민은 분명 필요하다.

또 사람에 따라서 여행의 방법은 분명 다를 수 있다. 액티비티를 즐기는 형은 매년 가는 제주를 5박 6일 동안 혼자 갔다고 하니 그 기간 동안 도대체 뭘 하냐고 묻더라. 우린 모두가 다르고, 그에 따라 충전하고 쉬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형과 나는 다름이 분명하지만, 다름이 반드시 틀림은 아니다. 내 방식대로 내가 충분히 누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내게 이번 제주 여행은 충분했고,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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