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2020년 봄, 제주

혼자 또는 함께

제주엔 보통 혼자 여행을 간다. 숨 막혀 죽을 듯할 때 제주를 찾다 보니 아무래도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필요해서 보통 혼자 제주를 찾는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제주에 있는 지인이 있으면 밥 한 끼 정도를 함께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혼자 제주에서 쉬는 게 좋았다.

함께 했기에 묵을 수 있었던 숙소의 풍경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고, 그래서 특별했다. 이번에도 기본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1년 넘게 보지 못한 동생들과 연락되어 차를 한잔 했고, 마찬가지로 거의 2년 정도 보지 못한 형 부부와 같은 숙소를 2박 3일 동안 쓰면서 따로, 또 함께 했다. 그 부부와는 제주에서 '놀러' 또는 '쉬러' 다니는 것은 따로 하고 에어비앤비에서 함께 묵으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또한 그대로 의미가 있더라.

다른 사람들, 그것도 마음이 맞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랜만에, 그것도 제주에서 만나니 서로의 근황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나눌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모여봤자 4-5명이 2-3시간 모이는 것이다 보니 깊은 얘기를 하지는 못했는데, 더 적은 수의 사람이 더 오래 만나니 대화가 그만큼 깊어졌다.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이동 중에도 대화를 하니 말이다. 싱글인 내 입장에서는 '이 부부의 패턴을 어떻게 존중해 줘야 하나...'가 처음엔 고민이었지만 나와 여행 패턴이 조금은 다른 부부라서 낮 시간은 각자 패턴대로 지내기로 했다. '일을 해야 해서 난 오늘 숙소에 있겠다'는 핑계를 대고.^^

함께 숙박했기에 할 수 있었던 바베큐.

세 사람이 움직이니 현실적으로 좋은 건, 아무래도 혼자 다닐 때는 먹지 못하는 것들을 먹을 수 있게 되더라. 거창한 회 세트도 먹었고, 숯불 돼지고기 바비큐도 숙소에서 했을 뿐 아니라 혼자서는 마시지 못했을 술도 함께 하니 마실 수 있게 되더라.

조금은 외골수적으로(?) 제주를 찾고, 여행은 기본적으로 혼자 떠나서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 함께 해 보니 그 또한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장점이 있더라. 그런데 사실 함께 한 시간이 좋았던 것은 단순히 '혼자서는 먹지 못하는 걸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을 넘어서, 대화를 통해 지금의 내 상황과 모습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런 점에 비춰봤을 때 함께함이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그만큼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그 부부와 함께 지낸 후에 다시 혼자만의 여행길을 나섰을 때가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자유롭고 좋더라. 그리고 혹시라도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어도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이런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함께 했을 때 나 혼자 온 것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더라. 결혼한 지인들은 '싱글이니까 그러고 다닐 수 있는 거야'라고 하지만, 정말로 결혼하면 이렇게 혼자 여행을 한 번씩 다니는 것은 불가능할까? 서로에게 그런 시간을 일 년에 한 번씩은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행 후반에는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돈이 되지 않더라도 올해 시작하기로 한 일들에 대해서 계획을 세웠고, 무겁게 끌고 다니기만 했던 노트북을 드디어 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머리가 아파지면 '몰라, 일단 난 여행 왔으니 좀 쉬자'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 시간이 2박 3일. 나의 이번 제주 여행의 후반기에 가서야 그렇게 나의 올해, 그리고 어쩌면 인생 전반의 해돋이가 시작되었다.

나의 작업실이 되어준 카페 '제주동네'

 

'여행 > 2020년 봄, 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제주여행을 위하여  (0) 2021.01.22
제주의 책방들  (0) 2021.01.22
제주 여행의 방법들  (0) 2021.01.22
제주와 어울리는 식당  (0) 2021.01.22
로컬푸드를 먹어요  (0) 202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