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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3년 봄,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 유랑기_동행

혼자 걷다

앞의 글에서 설명했듯이 까미노를 혼자 걷는 것은 혼자 생각을 할 시간도 많아지고, 본인의 페이스대로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때때로 외로워진다는 단점도 있다. 그나마 그날 묵는 알베르게가 적당한 규모라서 같이 뭔가를 해 먹는 분위기이거나, 이전에 길 위 또는 직전 알베르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있으면 대화하거나 같이 밥을 해 먹을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외로움은 확실히 덜하다. 하지만 거대한 알베르게에 묵게 되어서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있게 되면 그 날은 정말 말 한마디 할 일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때문일까? 까미노를 혼자 걸은 순례자들은 길 위에서 얼굴을 본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수고했다고 말하게 되더라. 나 같은 경우 하루 정도 고민하다가 산티아고를 지나서 피네스 테라까지 가기보다는 산티아고에서 며칠을 더 보내기로 마음먹고 머물러 있었는데, 대성당 앞에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마주치면 그렇게 부둥켜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까미노를 혼자 걷는 것은 꽤나 괜찮고 새로운 경험이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고민이 있어서 까미노로 떠난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같이 걷기보다는 혼자 걷는 게 더 좋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동행해주기 때문에 혼자 걷는 외로움이 어느 정도는 상쇄되기도 한다.

혼자 걷다 보면 거대한 알베르게에 혼자 묵는 일도 생긴다 2013년 3월.

로망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만약 내게 인생에 '로망'이 있냐고 묻는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생기기 전에 아내랑 한 번,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아이 또는 아이들과 한 번 까미노를 걷는 게 내 유일한 로망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는 내가 까미노 위에서 함께 걷는 부부, 그리고 함께 걷는 가족을 보면서 그들의 까미노가 혼자 걷는 나의 까미노와 다름을 본 영향이 크다.

부부가 까미노를 같이 걷는 경우를 나는 몇 번 봤는데, 어떤 이들은 부부가 까미노를 같이 걷고 나면 사이가 나빠진다고 하지만 내가 봤던 부부들은 그렇지 않았다. 까미노를 걷는 부부는 보통 상호 간에 보폭과 속도를 맞춰가며 걷더라. 보통 남자가 키가 더 크고 체력도 더 좋다 보니 남편이 아내의 페이스에 맞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더라.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점들에 대해 들으면서 '나도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와 단 둘이 한 달 정도 까미노를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그건 내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3남매를 둔 미국 목사님 가족과도 며칠을 알베르게에서 마주쳤는데, 그 가족이 함께 걷는 모습은 내가 까미노 위에서 본 어느 순례자들의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때로는 아이들이 앞서가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주의하라고 말하면서, 미국에 있을 때는 나누지 못한 대화들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가, 정부의 역할이 이렇게 커지고 분명하기 전에 모든 가족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

옆에서 본, 가족끼리 까미노를 걷는 것의 장점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끼리 하지 못한 대화를 까미노에서의 삶이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와, 또는 자녀들까지 데리고 까미노에 온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더라. 거기다 더해서 한 달 정도를 같이 걷는 시간은 그 가족이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이 되어서 까미노 이후에 더 친밀하게 지내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나는 까미노를 걷고 돌아와서 보게 됐다. 올해 초 제주에 갔을 때 하룻밤 신세를 졌던 까미노를 같이 걸었던 한국 부부의 모습에서,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지금도 확인하는 그 목사님 가족의 모습에서 나는 지금도 시시때때로 까미노를 발견한다.

한 구간을 같이 걸었던 독일 대학생 커플 -2013년 3월

신혼여행으로 간다고?

다만 신혼여행으로 까미노를 가겠다는 사람들은... 정말 그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거나 두 사람이 그 길을 걸어본 게 아니라면 개인적으로는 말리고 싶다. 이는 첫 번째로 보통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최소 1개월에서 길면 수개월까지 엄청난 에너지를 쓰는데, 그 뒤에 까미노를 걸으면 그 피로로 인해 두 사람이 싸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같이 사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새롭게 알게 되는 점들이 많을 텐데 그 속도를 높여서 산티아고에서 굳이 바닥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의 성향에 따라 까미노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잘 맞을 수도 있다. 조금 자유롭고, 날카롭지 않으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까미노로 떠나게 되면, 여행에서 두 사람이 갈라서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 간의 신뢰가 더 강하게 형성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까미노를 같이 걷듯이, 인생길을 같이 걸어가며 동행하는 것이니.

선택은 각자 하는 것이니까.

까미노를 출발하던 날. 생장.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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