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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일반적인 신앙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사도행전 29장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온누리교회는 한 때 사도행전 29장, Acts 29를 굉장히 강조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발걸음을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정신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우리 시대에 맞는 사도행전 29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사도행전이 다루고 있는 시기에는 예수님의 복음이 그 제자들과 초대교회를 중심으로만 확산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기성 유대교회와 부딪히고, 갈등을 겪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바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조금 과장을 많이 보태면 [종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와 우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다른 종교와 우상들을 비판하고, 복음을 바로 세워야만 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우린 [탈종교의 시대], 그리고 [합리성의 시대]를 산다. 물론, 인터넷에서의 잘못된 정보+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한 확증편향이 강화되는 사회적 흐름으로 인해 실제로는 비합리성이 만연한 시대지만, 우리 시대에 이성과 합리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비이성적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신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합리성적인 측면에서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걸 해낼 수 있는 근거와 자료들이 성경에 굉장히 많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내용도 굉장히 많고, 통찰력 있는 가르침도 많다. 궁극적으로 [믿음]의 영역은 논리와 합리성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영역이지만,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믿음]으로 믿고 넘어간다는 사실만 들이대면 그 부분도 이성적으로 넘어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설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탈종교의 시대에는 아무리 종교적인 주장을 해도 그 주장이 먹히지 않는다. 이미 종교는 없다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들이대든 설득이 될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의 종교가 없다는 [믿음]은 그들의 이성과 합리성이 반하면서도 선한 삶과 행위를 통해서만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돈, 명예를 추구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왜 그걸 쓰레기 같이 여기지? 저 사람은 뭐를 중요시하는거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하지? 라는 식의 질문을 하게, 궁금증을 갖게 만들어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호기심을 갖게 해줄 수 있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역할은 길거리로 나가서 전단지를 돌리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온 사람들,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말씀대로,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훈련하고, 흔들릴 때마다 잡아주고 서로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도운동, 부흥운동 같은게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복음 자체임을,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릴 것임을 항상 의식하고 긴장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들이 다른 종교와 유대교의 계파들과 종교적인 내용으로 부딪히면서 복음을 세웠다면, 우린 삶 속에서 내리는 결정과 말을 성경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셨을 방향으로 하면서 복음을 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선느 사도행전에서 발생했던 것과 같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초대교회가 따른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는 물론이고 유대교 계파와도 달랐듯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내리는 결정의 기준들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9장은, Act 29는 쓰여져야 한다. 다만, 우리 시대에 맞게, 필요한 방법으로. 그리고 그건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