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의 책임과 의무
'너는 부끄럽지도 않니?'
아버지께서 올해 회사를 최종적으로 그만두시면서 어머니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이는 부모님께서 회사원인 동생의 의료보험 밑으로 들어가게 되셨기 때문이었다. 그 행간에는 '너는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의료보험도 책임지지 못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니?'라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화가 났고, 늘 그랬듯이 난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
어머니께서도 당시 내 상황이 답답해서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장남'에게 요구하는 무언의 책임과 의무가 짙게 깔려있다. 아버지께서 장남이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이 한동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의외였지만, 이해를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는 '장남'이라는 지위가 갖는 의미는 별나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자녀'가 아니라 '첫 번째 아들'에게 그 지위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가부장제와 '첫 번째'를 더 특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 결합된 결과물일 것이다. 가부장제의 기준으로 남녀 중에 남자가 더 대우를 받기에 성별은 예선 통과의 느낌이고, 남자여야만 예선이 통과되니 그 후에는 순서대로 순위를 매기게 되지 않았을까?
장남이 받는 것
물론, 장남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것'에는 책임과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남은 형제나 남매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것들이 많이 주어진다. 이는 특히 장남이 첫 번째 자녀일 때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같은 형제라고 해도 첫 번째 자녀인 장남에게는 뭐든지 좋은 것으로 해주고, 처음 해주다 보니 조심스럽고, 많이 주려고 노력하는 게 '처음 부모가 된 사람'의 모습일 수밖에 없으니까.
차남만 해도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장남보다 물리적으로 받는 것이 훨씬 적다. 일단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차남은 형의 것을 거의 물려받을 것이고, 아이를 한 명 기르고 있는 부모는 첫 번째 자녀에게는 다 새로웠던 것들이 이미 한 번 해본 것이 되기 때문에 장남에게 하는 것만큼 둘째에게 해주지는 않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생각보다 본인이 알아서 크는 면이 있구나'라는 것을 인지한 부모들의 경우 둘째를 거의 방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부모도 사람인지라, 본인이 더 애정을 쏟고 많은 것을 준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는데 있다. 그래서 장남은 보통 집에서 기대도 더 많이 받고, 모든 것을 잘하기를 요구받으며, 마치 본인이 부모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을 받는다. 사회에서는 심지어 '형이 동생을 위해서 부모의 그런 기대를 깨야 한다'라고 할 정도니 장남들이 받게 되는 기대, 그리고 장남이라는 사실에 딸려오는 책임과 의무는 생각보다 크다.
장남이 아닌 형제, 남매들에 대하여
그에 반해서 장남이 아닌 형제, 특히 남매들은 엄청나게 손해를 보고 자라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지금의 30대들이 자랄 때까지는 그랬다. 우리 큰삼촌의 경우, 누나가 셋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아들이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오냐, 오냐 하면서 귀여움을 받았고 본인의 누나들이 받지 못하고 먹지 못한 것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어디 그때뿐이겠나? 내 또래들만 해도 조부모님들이 손녀보다 손자를 훨씬 반가워했고 아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장남이 아닌 형제, 특히 남매들은 물리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 손해의 수준이 단순히 맛있는 걸 못 먹고, 좋은 것을 갖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공부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산아제한 운동'이 펼쳐지면서 한 집에 아이의 수가 확연하게 줄여 들기 시작하면서 그런 차별이 조금은 덜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먹고, 입고, 갖고, 누리는 것에 있어서 차별을 받은 상처가 작을 수는 없다. 이는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다양한 영역이 형성되어 있으면 한 영역에서 그 정도 손해를 보는 게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 외에는 깊은 관계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에게 그런 처우를 받게 되면 그 상처는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장남에게 발생하는 것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장남에게 그렇게 모든 것을 몰아주면 장남이라도 좋아야 할 텐데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는 데 있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수성'에 높은 가치를 뒀을 때나 맞을 수 있는 말이다. 이는 남자아이를 처음 기르는 부모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장남은 형제들 중에서는 보수성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표현은 장남이 부모의 말을 잘 들었을 경우에나 그나마 맞는 말이다. 정말 극도로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장남들 중에는 자신에 대한 기대로 인해 자신을 틀에 가두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과 부모는 장남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를 억압하는 것으로 작용할 때 받게 되는 상처로 인해 엇나가는 장남들도 굉장히 많다. 그리고 창의성이 중요해지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부모의 틀'에 맞춰져서 만들어진 장남들은 그 사회의 중간은 확실히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엄청난 성공을 하기는 힘들다.
조선시대의 왕들만 보더라도 장남이었던 왕보다는 장남이 아니었던 왕들이 뛰어났던 경우가 훨씬 많았다. '보수성'과 '자유로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것이 중요해질수록 최소한 내 또래들에게까지 장남들을 대했던 우리 사회의 방법은 장남들이 크게 성공할 수는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남들이 그렇게 받는 것은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부모들이 장남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장남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장남보다 여자 형제나 동생이 더 잘 나가는 경우에도 부득불 장남에게 뭔가를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부모님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모의 모습은 또 장남이 아닌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니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없다.
모두를 죽이는 '장남 선호'문화
이처럼 '장남'을 선호하는 문화는 모두를 죽이는 결과를 야기한다. 장남은 많은 것을 받고, 그에 따라 더 쉽게 뭔가를 이룰 수 있지 않냐고? 그에 대한 통계가 나와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장남들은 본인이 장남이 아닌 사람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형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장남과 다른 형제간에는 보통 어느 정도 이상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장남이 아닌 형제들은 '쟤가 모든 것을 더 누렸어'라는 마음이 있는 반면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장남들은 많은 경우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떤지를 대부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의 차이는 결국 형제관계를 갈라놓는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장남이 부모의 말을 잘 들어서 부모의 기준으로 '번듯하게 컸을 때' 많이 나오는데, 이는 그러한 경우에는 '장남이 더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시선과 판단이 장남과 다른 형제들 사이에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서 형제들과 등을 돌리게 된다면, 그건 과연 그에게 좋은 일일까?
이처럼 장남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것은 장남은 물론이고 다른 형제들까지 모두 죽일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다. 장남이 아닌 남자 형제나 모든 여자 형제들은 부모님의 차별대우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장남들은 자신이 받은 만큼 자신에게 부과되는 책임과 의무의 무게에 허덕이고 판단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남'이라는 구분을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 또는 가치가 있을까?
사실 '장남' 또는 '장녀'라는 표현은 대부분 나라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표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유교사회에서는 유교적인 가르침이 그랬다고 치자. 자유와 평등을 헌법적 가치로 하는 국가에서는 이제 그런 문화는 걷어냈으면 좋겠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를 그러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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