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회사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하셨고, 사내 정치에 떠밀려 임원이 되지 못하셨다. 어떤 이들은 그게 사내 정치 때문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겠지만, 아버지 이름은 계열사 사장까지 임원 승진에 동의했지만 이례적으로 더 높은 곳에서 최종 승인을 하지 않아서 임원이 되지 못하셨다. 그것도 세 번이나. 아주,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나도 회사생활을 해봤고 지인들 중 상당수가 대기업에 다니지만 그런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곧은 분이셨고 그 과정에서 회사 안에 있는 힘 있는 분과 갈등이 있었고 그건 아버지에게 독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그 회사에서 처음으로 정년퇴직을 했고 계약직으로라도 더 있어줄 수 없냐는 제안을 받으셨었다. 거절하고 나오셨지만.
그런 내게 고등학교 때부터 강요 아닌 강요된 전공은 항상 경영학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갈 수 있는 최대한 좋은 학교의 경영학과. 이유는 하나였다. 취업에 가장 유리하니까. 내가 모교에 입학했을 때 사회계열에 속한 학부생은 10가지 전공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그 안에는 경영학과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 학교에서 그렇듯 경영학과는 10개 전공 중에 학점 커트라인이 높았다.
내 1학년 때 학점은 그 커트라인을 통과하고 남을 수준이었지만 난 경영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1학년 12월 초에 입대를 하게 된 나는 전공신청을 직접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전공을 신청은 못해도 선택은 해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기에 부모님께 무조건 정치외교학으로 신청해 달라고 했다. 부모님께서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해서 뭐를 하겠냐며 한숨을 쉬고 뜯어 말리셨지만 1지망과 2지망을 모두 무조건 정치외교학으로 하시라고 했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후에는 주위에서 은근히 경영학을 복수전공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압박이 있었다. 내가 워낙 고집이 센 것을 아니 부모님은 대놓고 그러진 못하셨고, 다른 사람들의 은근한 압박이 오히려 더 심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취업. 문과는 경영학 전공자가 안되면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경영학 전공 또는 부전공을 스펙에 올려놔야 한단 것이 그 논리였다. 하지만 고집이 워낙 세고 하고 싶은 것, 재미있어 하는 것을 해야 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보니 난 내 전공수업과 다른 전공들 중에 흠이가 가는 전공수업들로 시간표를 가득 채워서 정치외교학 전공 하나만 달고 졸업했다.
취업에는 성공했다. 대기업 중에서도 당시에는 엄청나게 선호되었고, 지금도 상당히 선호되는 회사에. 취업하고나서 동기들의 배경을 보면서야 주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이해되었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았다. 200명이 조금 안되는 입사동기들 중에 정치외교학 전공자는 나 외에는 한 명 밖에 없었고, 그 형 마저도 경영학을 부전공을 한 상태였다. 나머지 문과 출신들도 거의 경영학을 스펙에 달고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라인은 사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자와 남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경영학을 전공해야 한단 압박은 여자보다 남자들에게 더 강하게 가해진다. 경영학을 절대로 공부하고 싶지 않았던, 그나마 타협이라고 한게 경제학 전공수업을 수강한 나로써는 그게 조금은 부러웠다.
물론, 그런 문화가 여자들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도 남녀차별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돈 벌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대학은 갔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그 말 이면에는 '여자는 가정주부를 하면 돼' 또는 심한 경우에는 '여자는 가정주부나 하면 되지 무슨 취업을 하려고 해'라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 시대에도 그렇게 사고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적지 않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 중에는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그런 사고방식에 분노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하는 여성들도 이제는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해석해 보자. 그건 반대로 '경제적인 것에 너무 구속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거기에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그 말은 '경제적인 것은 남자들의 책임이니까 너희는 그걸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해'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남자들에게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돈을 잘, 많이 벌어야 한단 책임감이 지워진다.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택하거나 아예 장사나 사업을 해서 돈을 잘 벌어야 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산다. 남자들에게 그런 압박이 유난히 강한 것은 사실이고, 남자들은 대부분이 그런 기준에 의해서 전공과 진로를 선택한다.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로움만을 기준으로 말이다.
이는 경영학과 남녀성비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경영학과 남녀성비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7대3으로 남자가 많았고 최근의 경우에 균형이 그나마 맞춰져서 6대4 정도인 경우가 많은 듯하다. 공부를 압도적으로 잘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이 더 많고, 경영학과 커트라인이 보통 문과 중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남자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적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남자니까 수학을 여자보다 잘 할 것이란 말은 사실 여자에게 성차별적인 시선이지만 남자에게도 폭력적인 시선이다. 남자라고 다 수학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내가 수학을 엄청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남자들은 그런 적성과 무관하게 어렸을 때부터 가능하면 공대에 진학하라고 강요받는다. 이유? 취업에 유리하니까. 문과라면 경영학을 전공하는 것이 거의 정석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취업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기계가 되도록 강요받으며 자라난다.
남녀평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진정한 남녀평등은 단순히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데서 멈추는게 아니라 성역할을 완전히 파괴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성역할의 파괴는 성별에 따른 성향을 사회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개개인별로 성향을 존중하고 그 성향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데서 시작된다. 이는 여자도 단순히 '여자라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고? 여자도 일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거야'가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경영학을 전공하고, 취업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가정에 충실한게 꿈이라면 그것도 존중받아야 한다. '여자들이 가정주부를 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차별받는거야'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안된단 것이다.
반대로 남자들 중에서도 가정을 챙기는게 성향에 더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가정에 더 충실하고 돈을 조금 덜 벌어도 되지 않을까? 일보다 가정주부로 사는데서 행복을 더 느낀다면? 이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여자들의 연봉이 남자들보다 낮지 않나?'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지원자의 남녀 비율, 남자와 여자가 종사하는 업종의 노동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더 깊게 들여다보고 판단할 문제인 듯하고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그건 결국 남자를 다시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말에 불과하다. 돈이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고 큰 요소이긴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 않나?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남자의 성역할은 여전히 돈 벌어 오는 것으로 규정지어져 있다. 여자들에게 '집안일도 제대로 못해'라는 말이 폭력적이듯이 남자들에게 '돈도 제대로 못 벌어오면서'도 폭력적이다. 집안일을 제대로 못하는 여자를 폄하하기 전에 그 남자는 본인은 얼마나 집안일을 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집안일을 본인이 못한다면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일 (대부분의 경우 돈 벌어오는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돈도 제대로 못 벌어오면서'라고 비난을 할 것이라면,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하는 남자를 집에 앉히고 본인이 밖에 나가서 그가 벌어오는 돈보다 더 잘 벌어오면 된다. 여자가 꼭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듯이, 남자가 꼭 여자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남녀문제 중 상당부분은 남자들 중에 돈도 제대로 못 벌면서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도 하지 않고 어깨에 힘만 주고 대접 받고 싶어하는 마초들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자들도 꼭 돈을 벌어오지 않더라도 가정 구성원으로써의 역할과 책임을 할 때야 비로소 본인에게 권리가 생긴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타령하는게 일단 황당하고 천박하지만 그나마 집안일 타령을 하려면 본인은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하는게 맞다. 그게 자신 없다면 집안일을 같이 돕든지.
개인은 그 개인의 성향과 특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특정 성별이 이렇고 저렇다는 선입견은 남녀 모두에게 독이 된다. 나는 000하는 남자가 아니라 000한 사람이고 싶다. 우리 모두가 여자 또는 남자이기 전에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자 또는 남자로 취급 받기 전에 사람으로, 개인으로 존중받는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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