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많았던 아이의 눈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입학 이전의 기억들은 파편적으로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 중에는 좋은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아마도 내게 충격으로 남았던 것들이 내 가슴속에 깊게 새겨진 듯하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하관을 하려고 할 때 바로 옆에서 '꼬마자동차 붕붕'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사촌 형이 '00아 이제 할머니 못 보는 거야'라고 하자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 부모님께서 소리를 지르면서 크게 싸우셨던 기억, 열이 너무 많이 나서 링거를 맞았던 기억, 처음 치과에 갔던 기억 같이 힘들거나 아팠던 기억들 정도가 이미지로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그중에 작지 않은 부분은 내가 눈물을 흘림으로 인해 혼났던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놀이기구를 타는 게 무서워서 타지 않겠다고 울자 '사내자식이 이것도 못 타냐'라고 아버지께 그 놀이기구 앞에서 혼이 났던 기억이 가장 생생하고, 그 외에도 내가 울기만 하면 지겹게 들었던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야. 태어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들은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지겹게 듣다 보니, 난 어느 순간서부턴가 '뭔가 말이 안 되는데? 아기들은 하루에 몇 번씩 울고, 부모가 한 번에 돌아가시지 않는 이상 두 번은 우는 거고,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울 일이 없는 거잖아'라고 나 혼자 속으로 반항하고는 했다. 힘들거나 무서워서 우는데, 운다고 더 혼났던 기억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정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은 겁이 많거나 뭔가를 무서워하면 '남자답지 못하다'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남자가 그것도 하지 못하냐'라는 표현도 적지 않게 쓰이지 않나? 그런 표현은 남자들끼리 꽤나 자주 쓰이지만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런 표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렸을 적에는 어떤 형태로든 일주일이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는 횟수로 듣게 되는 표현들이었다. 특히 눈물을 흘릴 때면, '남자가 뭘 그렇게 자주 우냐'는 말을 듣는 건 거의 공식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남성성' 혹은 남성의 '폭력성'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다움'이란 울지 않고, 강하고,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사회가 남자들에게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단 것이 사실 얼마나 폭력적인가? 무서워서, 힘들어서 눈물이 나오는데 그걸 흘리면 내 정체성이 부인된다는 말은 그저 남자로 태어났을 뿐인 아이들에게는 과도한 무게를 지우는 것이 아닐까?
'남자다움'의 모순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에게서부터 그렇게 '남자다움'을 학습받은 '남성성'은 남자들이 이성에 눈을 뜨고, 신체적으로 성장하면서 '폭력'으로 정의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도 참으라고, 남자는 강한 것이라고, 남자는 시금치를 먹어야 뽀빠이처럼 힘이 세진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힘이 센 것도, 박력이 있는 것도, 폭력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무식한 것'으로 평가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평가와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분별력 없이 힘을 쓰고, 자신을 위해서 박력 있게 굴면서 상대를 억압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엄청난 폭력이다. 그런데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남성성=강함]으로 인식을 강요받다가 갑작스러운 평가의 변화에 적응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남성성을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하지만 어떠한 면에서의 강함이 필요하고, 어떤 면에서 강함이 절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주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신체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학습시켜온 '남성성'에 대해 태세 전환을 한다한들, 10년 넘게 학습되어온 사실이 하루아침에 다르게 인식되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남성성=강함'으로 학습시키는 부모와 선생님들이 그러한 면에서 모두 우리나라의 남녀 간의 갈등, 불평등, 차별의 공범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남성성과 '여자는 약한 존재야'라고 학습시킨 사람들은 본인이 그러한 선입견으로 가르친 아이들의 수만큼 우리나라에서 남녀 간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학습은 '남자들은 강하고 여자들은 역하니까 남자들이 보호해 줘야 하는 거야'라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여자가 남자보다 열위에 있다는 인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데, [남자는 강해야 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하게 되면 이는 '여자는 약하니까 남자가 언제든지 지배할 수 있는 존재야'라는 공식을 만들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예민한 시기에, 그것도 적지 않은 숫자의 학교들은 여전히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아놓은 상황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획일적으로 정의, 학습, 훈련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는 토대를 만드는 효과를 내게 된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그 안에서 경쟁이 일어나면서 '강함'을 강조하는 문화가 더욱 강해지고, 동성끼리 존재함으로 인해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강해야 남자다'라는 인식은 깊게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
눈물을 흘릴 자유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통념은 원시시대에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남자가 전반적으로 신체적으로 더 강한 것은 사실이고,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살 수 있을 때는 그런 구분이 의미가 있었을 테니까. 국가들끼리 무기를 갖고 서로 죽이면서 전쟁을 할 때도 그러한 구분이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는 '신체적인 강함'이 생존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데 매우 중요했을 것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상대방으로 인해 본인을 얕보게 만들기 때문에 '남자는 태어나서 눈물을 세 번 흘린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한가?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남성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본인이 원시시대나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신체적인 강함은 오히려 '무식함'으로 평가되고, 신체적인 강함보다 머리가 좋거나 정서적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고, 그에 따라 그 사람들이 생존할 확률도 더 높다. 그리고 눈물을 잘 흘리는 것은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행위 자체가 감정의 정화에 상당한 수준으로 기여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연구에서도 입증된 바가 있다.
우리는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하는데 그치지 않고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여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섬세한 남자나 호탕하지 않은 남자에게 '남자답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은 많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연인이나 발랄하면서도 차분한 연인을 원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연인을 원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거나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를 원함과 동시에 '내가 필요할 때 내게 다 맞춰지는 사람'을 원하는 것인데 모순도 그런 모순이 어디에 있나?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은 장난감을 원하는 것이지 연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강함으로써의 남자답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강하고 용감하다는 의미에서의 '남자다움'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폭력성과 일방 통행적인 요소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다움'이 강함이라면, 그 반대말인 '여자다움'은 야리야리한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전제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남녀평등이 이뤄질 수 있을까?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존재하는 선입견이 사라져야 하고, 그 시작은 아기들과 아이들을 교육하는 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남자답다'와 '여자답다'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거나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최소화될 때, 남자들이 멜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펑펑 울어도 그 사람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될 때야 비로소 남녀 간의 진정한 평등이 사회적으로 안착될 수 있지 않을까?
ps.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에게 핑크색 옷을 입히고 인형놀이를 하게 하고, 여자들에게 파란색 옷을 입히고 로봇을 갖고 놀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그 또한 성별에 따른 특정한 성향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다 본인의 성향이 있으니, 그 성향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그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본인 다움'을 형성해 나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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