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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한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남자들의 학교 성적

공교육: 훌륭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공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교육 또는 이에 준하는 학교교육

한국의 교육시스템의 키워드는 경쟁이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위에 써 놓은 공교육의 사전적 정의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공교육의 목표는 대부분 '더 많은 학생을 좋은 대학교 보내기'로 설정되어 있다. 너무나도 천박한 표현이기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사실 모두가 암암리에 수긍하고 있는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그 속에서 여학생들에 대해서는 '여자가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니'라는 식의 폭력적인 생각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하는 선생님이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암암리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용감한 성차별주의자는 한국에 거의 없을 듯하다. 그런 말을 한 선생들의 사례가 뉴스화 되고는 하지만 사실 뭔가가 뉴스가 된단 것은 그게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그런 시선은 다수의 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이 은연중에 묻어 있는 말은 '사내 새끼들이 여자보다 성적이 안 나오냐?'라는 식의 말은 여전히 적지 않게 사용된다.  이 말 뒤에는 교묘하게 '남자가 여자보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숨어 있고, 그보다도 더 교묘하게 '여자는 굳이 성적 잘 받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이상이 없어'라는 생각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남자들에게도 폭력적인 말이다. 이는 이 말은 남자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여자보다 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채찍질.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한 DNA를 타고난 것도 아닌데, 우리 사회에서는 초중고등학교에서부터 남자들에게 무조건 여자보다 더 잘해야 한단 무조건적인 채찍질이 지금도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남자라고 해서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사실 여자들의 경우 워낙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런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잘 받을 유인이 있다. 본인들을 위해서, 본인이 더 인정받기 위해서 그래야만 하니까. 반면에 남자들에게 이뤄지는 '남자니까'라는 이유는 설득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너는 여자니까 공부를 좀 못해도 돼. 다른 거 하면 되니까'라는 식의 말을 들으면 여자분들은 '아니 내가 여자라고 해서 공부를 못해도 된단 건 말이 안 되잖아?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데 왜?'라고 화를 낼 것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 그 말을 들으면 난 '아니, 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공부를 잘해야 돼? 난 공부 말고 다른 건 하면 안 돼? 난 왜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야 해?'라는 마음이 들었었다.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 결과를 받아 들게 되는 과정에서 '남자'라는 사실은 내게 꽤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성취했을 때 그 결과는 잘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자이기 때문에 뭐든지 잘해야 되고, 실수하면 남자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사내 새끼이기 때문에 혼나야 하는 내 현실이 지독하게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공부도 적당히 하는 편이었고, 결국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남들이 보기에 '남자가 갈만한 길'을 꽤나 오랫동안 갔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어땠을까? 개인의 적성이나 성향에 대한 고려 없이 똑같은 내용을 교실에서 듣고 줄 세우기 위한 시험 속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심한 경우에는 사람 취급받지도 못하는 학교에서 승리하지 못한 남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저지르는 폭력사건의 가해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 공교육 시스템의 경쟁 속에서 계속 승리만 해온 사람과 계속 패배만 해온 사람들. 계속 승리만 해온 사람들은 그 채찍질을 견디면서 달리기만 하다 보니 지배 욕구로 가득 찬 상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자질도 쌓지 못해서 괴물이 되고, 계속 패배만 해온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아서 괴물이 된다. 물론, 공교육 시스템 속에서 계속 승리만 한 사람 또는 계속 패배만 한 사람들 중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가정이나 다른 관계에서 수용받는 경험을 거의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괴물이 되어버린다.

그들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성인이 되어서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다. 그 책임은 그 사람이 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공교육 시스템이 그런 괴물들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된다. 공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서 있었다면, 공교육의 목표가 경쟁이 아니라 [훌륭한 국민의 육성]이었다면 그런 괴물들은 조금 덜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에 따라 피해를 입는 여성의 수도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라는 요소로 더 압박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괴물의 수는 조금 줄어들었을 것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성적을 조금 덜 받고, 대학에 못 가거나 조금 덜 좋은 대학에 가도 된다는 말이 여성에 대해서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성적을 더 잘 받고 공부를 잘해야 하며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사실이 남자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하거나 조금 덜 받아도 된다는 이유에 성별 얘기는 넣지 말자. 이는 남녀 모두에게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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