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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한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남자들의 사춘기

나의 사춘기는 강렬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너처럼 유별난 애가 또 있는 줄 아냐는 말을 부모에게서 수년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 사춘기가 정말 유별나다고 여기게 되고, 본인은 유별난 애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마음속 어딘가에 깊게 좌표를 찍고 자리 잡게 된다. 내가 그랬다.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난 정말 유별난 아이였고, 삼십 대 후반인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부모에게 대드는 기준으로 한다면, 난 사실 여전히 사춘기를 겪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사춘기로 정의 짓는 시기에도, 지금도, 난 내 마음이 이끌고 내가 믿는 신에게 묻고 평안이 느껴지는 대로 결정하면서 내 삶을 끌어나가고 있다. 그 방향이 부모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방향과 맞지 않아서, 사회적인 기준으로 조금 독특한 경우들이 있어서 부딪히고 있을 뿐, 내가 그렇게 유별난 사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금 돌아보면 내 사춘기는 사춘기 같지도 않게 지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춘기라 부르는 중학교를 전후한 시절에도 난 부모님께 대드는 것만 빼면 매우 건강한 사고를 하는 바른생활 어린이에 속했다. 주위에는 마약, 술, 담배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이성과의 잠자리를 자랑하는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했고, 여러 나라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서 학생 회장도 했으며, 무엇보다 탈선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 정도면 건강하게, 잘 버틴 사춘기 아닌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해외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니지 않고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주위에 술, 담배, 이성과의 잠자리를 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약 하는 친구들은 없었겠지. 거기에 내 주위엔 여사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사춘기를 잘 버텨낸 것은 역설적으로 마약을 하는 친구들이 있고, 여사친들도 많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술과 마약을 하는 친구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되기 싫어서 술과 마약을 안 했고, 여사친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여자들의 생각을 그렇지 않은 남자들보다 조금은 더 잘 이해했기 때문에 성매매를 하거나 잠자리를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무엇이든 내가 선택하도록 요구받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보니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도 내가 내 주관을 갖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춘기 때 내가 본 가장 야한 영화가 '피아노'였고,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야동도 보지 않았고, AV가 뭔지도 몰랐으니 어찌 보면 난 한국 남자치고는 참 독특한 사춘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남자들은 내가 처한 상황과 정반대의 환경을 경험한다. 남중, 남고가 여전히 많아서 초등학교 이후에는 대학 입학 전까지 여사친이라고는 전혀 없는 남자들이 적지 않고, 성적으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에 남자들끼리만 있다 보니 여자에 대한 이해는 성적인 것에 대한 여자들의 생각이나 마음을 이해할 기회는 처음부터 박탈된다. 거기다 남자들은 경쟁적인 성향까지 매우 강하다 보니 (남성호르몬이 공격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가자) 줄 세우기와 암기만 시키는 공부를 강요하는 한국 학교에서 남자들은 스스로 패배했다고 느껴지면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로부터 승리했단 느낌을 받고 싶어 하게 된다.

사춘기의 남자들은 항상 강할 것을 요구받고,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줄 세우기에서 탈락하거나 뒤처지면 위로보다는 지적질과 질타의 대상이 되며, 감정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채찍질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통로는 열리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남자답게,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경쟁하고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짐승으로 취급을 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치 '나'는 없고 '경쟁'만 있는 듯한 세상. 한국 남자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와 같은 세상에서 사춘기를 보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은 스트레스를 은밀하고 자극적인 것을 통해 해결하기 시작한다.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길을 가는 이들 중에는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안되거나 좋은 성적과 대학에 대한 채찍질이 너무 심해서 옆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적지 않고, 그런 환경에 있지 않은 이들 중에서도 친구들에게 '남자다움'을 강요받으며 그 길에 발을 들이는 이들이 생긴다. 그리고 보통 사춘기에 성적 호기심이 엄청나게 많다 보니 그 은밀하고 자극적인 요소가 성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인간은 그런 류의 자극에 금방 익숙해지고, 그중에 적지 않은 이들은 더 은밀하게 찾아봐야 하는 수준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기 시작하는데서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그게 친구에 대한 폭력으로, 어떤 이들은 술로, 어떤 이들은 성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자극을 찾아가기 시작한 친구들은 보통 그 세 가지를 조합해서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꼭 그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승리하는 이들도 계속 압박을 받고, 그 과정에서 더 은밀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금전적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춘기 때는 그게 야동으로 향하고, 그렇게 사춘기 시절에 길러진 내성이 성인이 되어서는 그들을 유흥업소로 이끈다.

모든 것이 제도적인 문제라고 하려는 것도, 적지 않은 남자들이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제도가 다르더라도 그런 남자들은 분명 생길 것이다. 그런 남자들이 우리나라에서만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본인이 소중한 만큼 상대도 소중하단 것을 모르는 자들은 강제적으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만 부추기는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남자와 여자들을 분리해서 다른 공간에서 교육시키고 한창 성적 호기심이 많을 나이에 여전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성적인 것에 대한 얘기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금기시하는 우리나라 문화가 그런 결과를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 사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친구들은 지금 당장 어느 정도의 일탈을 했다 하더라도 그 친구가 가고 있는 길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그 친구의 이야기를,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것을 들어주고 함께 울어주고 안아주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남자들의 사춘기에서는 그런 경험을 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이고, 남자는 힘들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학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탈을 하는 이들은 위로받기 전에 그로 인해 다시 한번 혼나고, 나쁜 사람이 된다. 여기에서 또 문제는 그런 일탈을 하고도 공부를 잘하는 이들에겐 면죄부가 주어진다는데 있다. 이를 통해 공부를 덜 잘하는 이들은 박탈감이 심화되고, 공부를 잘하는 이들은 무의식 중에 공부만 잘하고 경쟁에서만 승리하면 어떻게 살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괴물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 환경에서 망가지고, 왜곡되면서 이상해지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유난히 더 많은 것은, 아니 눈에 더 잘 띄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경쟁적이고 신체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여자들의 경우 남자들만큼 경쟁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걸 다른 영역에서의 경쟁으로 풀어내려 하기보다는 위축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고, 그렇게 풀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남자들이 신체적으로 더 강하다 보니 남자들만큼 폭력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진 않는 듯하다.

내가 그런 남자들이 만들어지는 시기를 사춘기로 지목하는 것은, 인간은 그 시기에 가장 예민한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시기에 억압이 가장 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사춘기에 경험한 것은 그 사람에게 계속 영향을 준다.

부모를 잘 만나서, 덜 억압받고 자란 덕분에 왜곡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잘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 환경 덕이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한국에서만 학교를 다녔다면 나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더라. 그게 오직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자. 사실 시스템이 이상해도 부모님이 아이들을 잘 잡아주면, 그 아이의 세계는 왜곡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다른 길로 가지 않는데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보수적인 부모님과 내게 선택할 자유가 항상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내게 주어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보수적인 부모님 덕에 내가 그렇게 가지 않을 수 있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상처도 많고 컸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준 것 또 한 '내가 선택할 자유'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나의 길을 갈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고 그 길에서 실패해도 괜찮다고 주위에서 말해준다면 그 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는 낮아지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은밀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갈 유인이 적어진다. 그리고 내가 무조건 경쟁으로 떠밀리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를 충분히 고민할 공간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본인의 미래를 두고 계산을 해서라도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그 길을 가면 무엇을 잃게 될지를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춘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아이들은 경쟁으로 내몰리고, 남자들의 경우 그 과정에서 '남자다울' 것이 왜곡되며,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서 왜곡된 남성성은 폭력으로 변질된다. 하필 남성호르몬이 본격적으로 분비되는 사춘기에...

남녀를 둘러싼 문제들 중 상당수는 그 과정에서 씨앗이 뿌려진다.

다시 말하지만, 제도가 바로잡힌다고 해서 괴물 같은 남자들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사회에서나 그런 종류의 문제는 발생한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에 대한 면죄부를 주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그것도 남자들로 특정되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어디에서 발생되는지, 왜 그렇게 생기는 지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뿌리부터 파악해야 하니까. 은밀하고 자극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이 유난히 경쟁과 점잖은 척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많이 생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