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팀장님,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팀장님은 독특하셨다. 아주, 매우, 많이. 홍보실의 특성상 기자들과 만나야 할 일이 많았던 사회생활을 해오신 탓에 우리 힘은 언론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은 기자들과 술자리를 종종 가지셨고, 그러고 나면 꼭 회사 책상 밑에서 주무셨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출근했을 때 알코올 향수를 뿌린 듯한 향에 어제와 같은 옷을 입으신 팀장님을 마주했다.
팀장님은 그럴 때면 내게 '야 씨뱅아' 아니면 '야 머리 큰 놈아'라면서 내가 책상에 갖고 있는 잎 녹차를 달라고 하셨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그리고 툭하면 실장님과 고무줄을 갖고 손가락 총을 만들어서 쫓겨 다니시는데, 그때의 분위기는 드라마에서 연출을 그렇게 해도 과장이 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일들은 내가 있던 홍보실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팀장님은 아주 매우 유려하게 일을 잘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셨고 회사를 아끼는 마음이 컸으며 본인의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줄 아셨으며 본인이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담당자의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그런 팀장님에게서 아주, 매우, 가끔 보이는 참기 힘든 행동은 회식 후 기분이 좋아지시면 남자 후배들에게 키스, 뽀뽀가 아니라 키스를 하시는 것. '아니 무슨 남자한테 키스를 해요!'라고 하면 '그럼 여자한테 하냐!'라고 하셔서 할 말이 없게 하신 팀장님. 이게 매일 있는 일은 아니고, 보통은 볼에다 뽀뽀하는 수준으로만 이뤄졌는데 한 번 당하면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더라. 2년 조금 넘게 있으면서 한 번 당한 게 10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고 그 후로는 그 식당을 지나칠 때면 소름이 끼칠 정도니까.
직작 생활의 성희롱에 대한 글을 쓰면서 팀장님 얘기를 먼저 한 것은 [직장 내 성희롱]이란 말을 들으면 난 그때의 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팀장님 개인이 싫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팀장님께서 악의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팀장님께서 그런 남자들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팀장님은 정말 순수한 분이셨다. 다만 그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홍보업계의 문화가 시대에 맞지 않게 되어서 그 간극에서 갈등과 불편함이 있었을 뿐이다.
사실 남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자들에게 성희롱을 당한다. 군대에서 남자 후임을 상습적으로, 그것도 상대가 잠들었을 때나 술에 만취했을 때 성추행을 한 인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남자들은 남자들 사회 안에서도 성희롱을 경험한다. 남자들은 물건이 얼마나 크냐, 누구랑 자 봤냐, 누구는 어떻지 않냐, 누구는 동성애자 같지 않냐 와 같은 말을 시시때때로 듣는다.
그나마 본인 얘기나 경험을 떠벌리듯 말하는 사람들은 나은 편이다. 상대의 생각, 성적 경험을 꼬치꼬치 묻는 경험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이는 그런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는 상대의 성적인 능력에 대한 코멘트나 본인 생각이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남자들끼리 이런 얘기하는 게 어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직장에서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이나 상사에게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남자들이 경험하는 이런 문화는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정상적인 남자들은 동료 여자 직원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잘하지 않거나 시도하더라도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 '같은 남자'라는 이유로 그런 대화가 보호막이 내려진 상태로 적나라하게 이뤄진다. 그리고 여자분들이 나오는 술집에 가는 게 불편한 남자들도 당연히 그런 문화를 좋아하고 즐길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곳에 강제로 끌려간다. 남자들 간의 관계 또는 남자들의 사회에서 그걸 대놓고 거부하는 건 쉽지 않다. 남자들이 함께 있는 집단에선 대부분 그런 묘한 압박이 존재한다.
나는 그에 대한 예외에 속했다. 처음 부서 배치를 받았을 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지, 책상 위에는 성경책이 놓여있지... 지금 돌아보면 선배들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고, 그때는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성경책을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 덕분에 언어적으로는 남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에 끼어야 했던 적은 있어도 남자들의 유흥문화에 호출되지는 않았다.
여성에 대한 남자들의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문화는 남자들 간의, 또는 남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의 결과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것이 불편하던 남자들도 그런 남자들의 문화 속에서 그런 대화와 행동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그 안에서 종종 이뤄지는 '여자들도 다 좋아하면서 내숭 떠는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명제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러다 보면 몇몇 사람들은 어느새 선을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상당수 남자들은 그런 문화에 피해자로 들어가지만, 그중에서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은 가해자가 되어 나온다.
남자들의 이런 문화는 중고등학교 때보다 사회생활을 할 때 더 활발하고 다양하게 이뤄지는 듯한데, 이는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돈이 있고 중고등학교 때는 그런 문화가 또래들 간에 있어서 피하는 게 가능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런 문화가 수직적인 위계질서에서 강제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성희롱과 성추행부터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문화가 괴물들을 남자들의 관계에서 계속 재생산해낼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필을 하지 못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남자는 성희롱과 성추행의 가해자는 될 수 있어도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적지 않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끄집어내는 순간 그는 남녀 모두에게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라는 피드백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 일했던 남자 선배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난 내 직속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친하지 않은, 다양한 조직에 속한 남자들의 모임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한 듯하다. 그런데 그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런 문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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