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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한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남자도, 가장이고 싶지 않습니다

가장: 가족을 통솔하고 대표하는 사람

가족을 '통솔'하고 '대표'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책임을 수반한다. 통솔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어디로 향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가족을 끌고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표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이해도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가장=남자]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게 박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부터 여성도 세대주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가장은 남자라는 식의 유교적인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야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교를 모든 사회질서의 기반으로 삼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유교를 전제하고 있지 않지 않은가?

한 가정의 가장은 무조건 남자여야 한단 인식은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남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권위의식에 가득 차 있기도 하고, 그로 인해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인식은 심지어 결혼하기 전 연애를 함에 있어서도 남녀의 성역할을 정해놓음으로써 어렸을 때부터 남자에겐 부담을, 여자에겐 열등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 것이 남자들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미혼 여성들도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혼할 때 남자의 경제력이 중요하단 응답비율이 90%를 넘고 남자의 직업과 직종이 중요하단 비율이 80%가 넘는 설문조사와 결혼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 경제력이라고 답한 여성 비율이 40%가 넘는 설문조사들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또 본인의 수입이 일정 수준 이상 되는 여성의 경우 남자의 경제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셀럽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뉴스화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 글들에서도 말했지만 결혼하는 데 있어서 경제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남자의 경제력이 중요하다고 답한 이들 중에서 본인의 경제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기 때문에 상대도 경제력이 최소한 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만약 '그래야 상대가 자격지심이 없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전제된 것이라면 그건 건강한 생각이겠지만, 만약 '남자가 나보다는 많이 벌어야지'란 생각이라면 그 또한 남자가 한 가정에서 가장으로써 책임을 더 져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같은 맥락에서 본인보다 학력이 높거나 경제력이 높은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는 남자들의 생각도 이상하고 모순적이다. 이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심지어 경제력이 있는 여자를 만나서 본인이 가장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도 있는데, 그런 남자들은 남자들에게도 부끄럽고 혐오스러운 존재다.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상형으로 '남자다움'을 꼽는 문화 역시 가장은 남자가 되어야 한단 것을 전제로 하는 문화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만큼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남자다움은 보통 듬직하고, 의지할 수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남자다움은 가장의 역할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임지는 존재'가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상당수 남자들은 그런 책임을 오롯이 혼자 부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완전히 50대 50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남녀가 진정으로 평등하다면 가정과 연인관계에서 서로가 어느 정도의 책임과 부담을 최대한 50대50에 가깝게 나눠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본인이 힘들어도 그걸 배우자나 여자 친구에게 티를 내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연애할 때는 '남자다움'이란 추상적인 명제로 요구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과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런 부분들이 크게 이슈화 되지 않는 것은 남자들이 그런 책임감이 부담스럽고 무겁다는 것을 털어놓고 나누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로운 남자들은 거의 없고, 그런 '남자다움'이 권위적인 생각과 자세를 야기하기도 한단 점을 감안하면 그 부작용은 작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남자들이 왜 과도한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차별적인 요소들은 남자들에게 그런 남자다움을 강요되고 전제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여성들이 차별받고 추행을 당하는 빈도와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와 어려움만큼 남자들도 남자다워야 하고, 책임져야 한단 압박을 받는단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남자들의 폭력과 차별은 사실 남자들에게 강요되는 '남자다움'을 제거하지 않는 한 완전히 해결되기는 힘들 것이다.

아이들이 왜 남자의 성을 따라야 하냐며 여자의 성을 따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부모님의 성을 모두 이름에 넣는 사람들도 있다. 난 그런 주장들에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남자들 중에는 그런 주장이 유별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그들에게 그런 주장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사회에서 가장으로써의 의무와 책임은 여전히 남자들에게 부여되는 분위기는 유지되면서 여성의 입지는 확대하고 확장하는 분위기가 차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남자의 성을 쓰느냐, 여자의 성을 쓰느냐, 두 성을 다 쓰느냐와 같은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아이가 엄마 성을 갖고 있으면 그건 역으로 아빠들에 대한 차별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식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엄마의 성과 아빠의 성 중 어떤 성을 먼저 쓰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에 대한 논란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어떤 성을 쓰는지가 그 사람의 의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의 [성]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누가 그 가정의 [가장]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는 '남자가 가장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꼭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게 진짜 남녀평등적인 생각이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가장으로써의 책임을 홀로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남녀관계와 관련된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은  사회적으로 남자들의 책임을 덜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는 남녀관계에서의 차별과 폭력은 '남자들이 이만큼 책임을 지고 있잖아'라는 생각과 '남자다움'을 전제로 함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