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 /한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모든 남자가 같은 종자는 아니다

미투가 터지고, 유력 정치인들의 성추행과 성폭행에 대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지난 몇 년.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그제서야 한국 여성들이 어떤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지를 알게 됐다. 혹자는 미투가 터지고 성추행, 성폭행은 예외적인 케이스들이라고 하지만 내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내 회사 동기에서부터 학교 후배들까지, 남자들에게 성폭행까진 아니어도 성추행을 당하지 않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이 나선다고 해서 세상이, 회사가, 사람이 바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알고, 자신이 경험한 것이 진리고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부남이 애인 하자고 연락 오고, 얼굴만 아는 회사 사람이 나랑 사귀자고 연락 오고, 술자리에서 툭하면 성희롱적인 얘기를 하고, 술 취했다는 핑계로 여성의 몸을 더듬는 경험을 수시로 당한 우리나라 대부분 여자들이 [남자]라는 성별 전체에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 가해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남자]라는 사실 뿐이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들 중 상당수가 이처럼 [남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것은 남자들, 최소한 상대적으로 젊은 남자들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 중 그런 가해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끼리끼리 모여서 자랑하듯 얘기를 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끼리 조용히 그런 얘기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대부분 또 그런 사람들이 가하는 가해가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선 [남자]가 집단적으로 죄인 취급받는 것이 억울한 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런 남자들은 또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그런 경험에 비춰봤을 때 본인 주위에는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남자들 중에 그런 가해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히 소수라고 말할 자신이 없고, 우리 윗세대의 가부장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미투와 성폭행, 성추행 등의 사건이 터지면서야 비로소 내게 들어온 몇몇 지인들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부풀려진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예상하지 못한 얘기들도 있었다. 엄청나게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군대에 있을 때부터, 가장 얌전해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성적으로 폭력적일 수 있는 지를 여러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내가 남자인 게 부끄러워지고는 했는데, 그런 마음이 들은 후에는 '내가 왜 남자인 사실만으로 부끄러워해야 하지? 그들이 한 어떤 행동도 난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그들과 하나의 부류로 엮여야 하고 마치 공동체인 것처럼 그들의 일로 인해 내가 부끄러워야 하지?'란 생각이 들더라. 억울했다. 내가 차라리 그들과 가족이거나 오랜 시간을 하나의 집단에서 보냈다면 내가 부끄러운 게 억울하겠지만, 한 번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 또는 서로 알긴 해도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로 내가 부끄러워지고 치욕스러워져야 하는 게, 억울했다.

남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성적인 측면에서 가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남자들 중에서도 그런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혐과 여혐적인 분위기가 수면 위에 적지 않게 드러나 있는 상황에선 그런 남자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혐오스러워하고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내가 항변 한다한들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더 공격당할 것 같은데 누가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에 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 극단적인 사람들은 또 여혐의 편에 서면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무엇인가를 없애야 할 때, 처벌하고 근절해야 할 때는 특정 집단을 하나로 묶어서 적대시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적이거나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침묵하거나 '너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무조건 적으로 분류해? 그럼 적이 되어줄게'라는 식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접근은 이미 처치해야 하는 적이 많은 상황에서 더 많은 적을 만들기만 한다.

이 시리즈에서 한 땀, 한 땀 설명했듯이 남성주의적인 문화는 우리 사회에 굉장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 문화는 하루아침에, 단칼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져야 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는 편에 서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남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설정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렇게 좋은 전략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남성주의적인 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는 이성적으로 한 땀, 한 땀 정교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쳐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바뀌지 않더라도 그들이 더 많은 가해를 하는 것을 억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남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퉁치고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런 방법과는 거리가 멀고, 현실을 개선시키기보다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여자들 중에 꽃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여자들이 꽃뱀은 아닌 것처럼, 남자들 중에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쓰레기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여자를 꽃뱀으로 간주하는 것만큼이나 모든 남자들을 동질적인 쓰레기로 간주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 대립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