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얼마 동안, 기독교인으로 사는게 은혜롭고, 행복하고 이런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상황이 좋아지거나 기분이 평안해 지거나 하면 그게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의 즐거움, 행복, 은혜라고만 생각하는데, 2-3년 정도 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정확히 말하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재미]를 조금씩, 가끔씩 느껴왔고, 작년 정도부터는 그 재미의 빈도와 깊이가 깊어졌다.
그 [재미]는 내가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다른 사람이 입 밖으로 말하는 간증을 듣고 '말도 안돼' 또는 '나는 절대 저러지 못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생각이 되는데서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았던 돈, 명예, 결혼에 대한 집착이 완화되다 못해 '그냥 하나님께 맡겨버려'까지 되는, 지금 내 통장에 잔고는 분명 간당간당하는데도 평안한, 누가봐도 경제적으로 봤을 때 난 가정을 꾸릴 가능성이 0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방법이 다 나올거야'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당당하게 갖게 되는 재미. 내가 부인하고, 부정했던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되고 내 믿음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는게 재미있었고, 내가 하루만 말씀과 기도를 놔도 그 믿음이 희석되어가는 것을 발견하며 최대한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미쳤거나 나이브한게 아닌 것은 이런 나의 생각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재미는 또 다른 갈등을 가져온다. 이는 그런 재미는 "나의 생각과 가치가 세상의 것과 달라짐"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정말 그렇게 조정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어느 정도는 그 상태가 유지된다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부딪히게 된단 것을 의미하고, 사실 나와 직접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거나 매우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부딪힘은 크게 상관이 없다. 문제는 나의 그런 시선이 가까운 사람들과 다를 때 엄청난 갈등과 부딪힘이 생긴다는데 있다. 그 부딪힘은 살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어머니와 계속 부딪혀 왔다. 부딪힘의 결이 다양하게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사실 나의 시선이 위에서 말한 방향으로 바뀌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금의 내 상황이 안쓰럽고, 불쌍하고, 불행하게만 보여지신 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중인데 왜 계속 그러냐고, 내 길, 내 손 놓지 않으시는게 엄마는 어떻게 안 보이시냐며 반발했다. 어머니를 가르치려고 한게 아니라, 내 힘으로 그 [재미]를 느끼는게 아니고 내 안에도 여전히 그런 욕망과 욕구가 있다보니 어머니께서 그러시면 나도 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게 되어 힘들어졌기 때문에 반발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셈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100명을 잡고 100명에게 물어보면 SKT를 다녔고 서울대 로스쿨을 졸업한 사람이 나이 마흔에, 서울대 법대 박사까지 받고 지금의 내 상태에 있다고 하면, 내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통장까지 까면 이해되지 않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지난 10년 간 날 먹이시고 길을 열어주신 것을 경험했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그냥 믿고 신뢰하는 내가 세상의 기준에서는 '비정상적인' 또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래서 그게 재미있고, 은혜인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 있는게 아니라 아들, 형, 친구로서의 정체성도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특히 가족과 관련된 나의 정체성의 측면에서 이러한 나의 시선은 내 삶을 힘들게 한다. 제주도에 쉬러 가기 얼마 전에 어머니와 크게 부딪히고 나서 거의 한 달 동안 특별히 개인적인 연락을 드리지 않은 것도, 이기적이란 것은 알지만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어머니와 통화하면 힘들어지니까. 내 시선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게 되니까. 유교적인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이게 정말 나쁜놈으로 들릴 것이란 건 아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와 필요최소한의 연락을 카톡으로만 한 이후로 내 삶이 안정되고, 평안해졌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께서 서울에 며칠간 올라와 계셨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순간의 부딪힘. 그리고 나서는 연세드신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전부터 간간히 느꼈지만, 부쩍 연세드신 모습의,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이미지와 닮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 내게 강압적이고, 목표를 향해 달리도록 채찍질하던 어머니가 아니라 작은 것에도 서툴고, 약해져서 안쓰러워진 노인의 모습이 어머니에게서 보였다. 아니, 그 모습만 보였다.
그때부터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철이 없는게 아니라, 내 삶을 놓고 봤을 때는, 하나님과 나만 생각하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내 삶의 방식과 시선이 분명 맞는데, 그렇게만 가는게 내 가족을, 특히 부모님과 어쩌면 동생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로 인해 내가 무엇을 주지 못하고 있는지, 어떤 부담을 안겨주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는 있었고 그래서 마음이 급했으며, 그래서 여러 일을 벌리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한참의 갈등 후에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이게 무슨 짓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가장 오래된 기도제목은, 하나님께 '세상적인 욕심이고 내 욕심인 것도 아는데, 날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보게 하시려고 몰아부치셨으면, 이 기도제목은 들어주세요.'라면서 기도하는 것은 두 분께서 '하나님께서 얘를 이렇게 쓰시려고, 이런 일을 이렇게 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구나'라며 감사하실 수 있을 때까지 살아계시는 것, 가능하다면 내가 가정을 꾸리고 내 아이가 두 분을 기억은 할 수 있을 때까지 두 분이 살아계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럭셔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 안다. 우리 집만 해도 내 동생은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사실 부모님은 조부모님에 대해 뭐라고 하시든지 간에 내게 조부모님만큼 일방적인, 모든 걸 다해주는 사랑을 경험한 적은 없기에 늦게 태어나 그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두 분께서 돌아가신 후에 두 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서, 두 분을 기억하고 두 분 얘기를 할 수 있고 싶어서, 내 욕심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도한지가 10년도 넘었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의 힘듦은 세상과 부딪힘,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아니 그런 것도 힘든데, 그런건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온전히 신뢰하면 그렇게 힘들 것도 없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받아 넘기면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고 하나님께 더 집중할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내가 아는 하나님과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알고 받아들이는 하나님 간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생긴다. 그들의 마음도, 생각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길을 가야하고, 심지어 그걸 당연시 여기며, 그 과정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생각과 가치, 시선을 갖고 나가게 되기 때문에. 이건...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내 안에서 갈등을 만들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힘들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의 무게는,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무겁게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기에.
기차를 타고 올라오셔서, 캐리어를 들고 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가셔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차를 갖고 있다면 창량리역까지 모셔다 드렸을텐데... 저걸 들고 오르고, 내리고... 하실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고였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죄송할 일은 아닌 걸 앎에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건널목을 건너며 '여기까지면 돼'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도, 버스를 타고 캐리어를 타고 앉을 자리를 찾아 뒤로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도 눈물이 고였다가, 혼자 집으로 오는 길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휴대폰을 보니 따뜻하게 말해줘서. 필요한 것을 사줘서. 캐리어 끌고 가는거 사실 힘들었는데 정류장까지 끌고 가줘서 고맙다는 어머니의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하나님의 뜻, 사랑, 시선, 이런거 다 모르겠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멈출줄 모르고 흘렀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다윗의 가족은 얼마나 사울에게 핍박을 당했을까? 아니, 핍박을 다니지 않았어도 다윗이 도망쳐 다닐때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니,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 그를 제거해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의 육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가능하면 이 잔을 내 앞에서 치워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본인 육신의 가족이 아파하고 힘들 것도 눈 앞에 아른 거리지 않았을까? 사도로 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바울의 가족과 친척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고, 바울은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바울 뿐인가? 당시 유대사회를 감안해보면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중 자신의 가족을 등져야만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런게 진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의 힘듦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데, 그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가치관과 기준이 바뀌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의 핍박도, 힘들긴 하지만 내 기준과 가치관, 시선이 바로 서 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걸 입증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이라 믿고 가는 길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건, 어찌할수도 없는 힘듦이다.
머리로는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안다. 그게 맞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패륜적이거나 이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해석될 수 있단 것도 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어렵고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건 기도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가치와 나의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하도록, 같은 주파수 영역대에 들어올 수 있게 되도록.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의 기본임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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