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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기독교인, 물질, 성공, 명예 등-다른 종교와의 차이에 대하여>

음. 내가 이런 류의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난 얼마 간, 정확히 얼마 동안인지는 모르겠다. 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정확히는 이런 생각이 나의 생각과 고백이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은 나의 30대 전체를 통해서 나의 생각이 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 동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정의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것이 나의 인생관이고, 이 생각이 향후에 바뀔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는 이게 내 생각이란 것이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판을 깔아 놓는 것은, 내가 이 글에서 쓸 내용들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난 가식적이라고 생각했고, 인간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대부분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그런 고백들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나름의 근거도 있다. 그들은 그 말을 할 때 자신의 약함은 고백하지 않았고, 등을 돌리자마자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면서 그걸 다른 것으로 포장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기에 난 그들의 고백이 가식이고 위선이며 가짜 신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 말이, 형식적으로 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 껍데기에 보이는 것만큼은 사실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게 내 힘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닐 뿐...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에서 대부분 목회자들은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일] [세상을 쫓지 않는 것] 등을 말하지만 그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다. 이는 아마도 목회자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도 사실은 마음 속에 명예,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담하건대 그들 안에는 그런게 가득하다. 이는 그들도 사람이고 어떤 인간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걸 감추고 아닌 척 하며 포장하는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욕구, 욕망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자신이 사실은 명예, 권력, 돈을 쫓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자신의 그런 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거룩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한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목회자 중 한 명은 주일날 일하는게 싫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대놓고 말하며 투덜대는 친구인데, 나는 그가 그렇게 솔직한 마음을 대놓고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한다. 심지어 내 친구가 이런 목사라는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는 그 친구는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위선적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는 내가 봐온 어떠한 목사보다 더 반듯하게, 말씀을 놓고 고민하며 목사답게 살고 있다. 내 글을 거의 읽기 때문에 이것도 읽겠지만 티는 내지 않겠지? ㅎㅎ

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 것, 물질적인 것, 명예와 권력을 아예, 아예 추구하지 않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이라고? 불가능하다고? 맞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도를 닦고 그런 마음과 싸우려고 해도 우리 안에는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렇게 살려는게 목표여야만 한다.

그게 가능한 방법은 딱 한 가지 있다. 성령님이 도우시는 것이다. 다만, 그럴 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기독교인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겸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성령님께서 도우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을 빼고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힘으로 착하고, 선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하나님부터 볼테니까. 그렇게 내 힘으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받아들인 사람은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이는 그런 사람은 내 안에도 그러한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도우시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그게 말씀과 기도다. 말씀은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제자들과 교회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주는 책이다. 성경은 딱 거기까지지 현실에서 이래야 한다, 죽은 후에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를 설명해주는 설명문은 아니다. 그런게 유추될 수는 있지만 그건 성경이 쓰여진 배경지식, 원어 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해야 가능한 것이지 그런 공부나 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을 수준으로 성경에 명확히 쓰여져 있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며, 기도의 경우 우리가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한 통로이다. 그리고 기도는 [대화]다. 대화는 말하고 [듣는]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기도에서 [듣는] 것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성(?) 등을 이해하고 있어야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내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걸 놓고 고민하고, 하나님과 맞춰보고 하면서 묻고, 내 안에 들게 하는 생각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시는 말씀)을 맞춰가면서 우린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이 세상을 더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린 최소한 머리로나마 이 세상 일은 내가 노력한다고 뭔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 일들에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도 한계가 분명하단 것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보면 [우연히] 이러한 질서가 일어날 수는 없단 것도 알 수밖에 없다. 충분히 고민하고, 묵상하고, 분서해 보면.

그 과정을 지나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야 비로소 우린 진짜 [내려놓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온갖 욕망과 욕구가 다 있기 때문에 그 상태가 오래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마치 연인과 롱디를 하다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수준이 낮아져서 더 싸우고 멀어지듯, 우린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매일, 매순간 그러지 않으면 다시 우리의 욕구,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마음은 수시로 오르고 내리길 반복한다.

그런데 그 안에 그렇게 거하게 되면, 우린 우리가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데 한계가 있단 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렇게 된단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것, 가치 있는 것들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걸 굳이 쫓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먹고 살게는 해주실거야]라는 것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잘 먹고, 잘 사는게 우리 삶을 크게 바꾸지 못한단 것도, 그렇기 때문에 그걸 추구하는 게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도 머리로나마 알게 된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서 그런 관점을 갖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우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물질적인 욕심, 명예, 권력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린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왜 내게 이걸 안 주시지, 왜 이건 이렇게 하시지, 왜 내겐 이렇게 안 해주시지 따위의 불평, 불만도 갖지 않게 된다. 이는 그런 것들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그게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것이란 것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과 다른 결정]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은 그때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은 명예, 권력, 돈을 추구하는데 "그 따위 것 별거 아냐"라는 식으로 그것과 무관한 일을 벌리는 사람. 명예, 권력, 돈에는 합리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데 좋은 일이긴 한 일과 결정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과 다른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런 일의 기준은 [사람과 사랑]이다. 우리 모두가 같이 사는데 필요한 일,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일,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먼저 챙기는 일. 그럴 수 있는 건 [사랑] 밖에 없고, 힘든 사람들을 돕고, 현생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세상과 다른] 사람이고, 기독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청렴하거나 특별하게 달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건 첫 번째로 그렇게 하는게 훨씬 지속가능한 행복과 평안이 있기 때문을 알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물질적인 부와 명예, 권력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한계가 있고 우리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을 알기 때문이며, 세 번째로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어떻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최소한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게 주실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욕구와 욕망은 인지하고 살지만 이 사실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매일 나가면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진짜 기독교인의 삶이다. 오늘, 지금, 당장 내리는 결정들에 대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이라 함은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우리 안에 맡겨 놓으신 영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계획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지금 이 글을 이렇게 쓰고 매일 같이 브런치 글을 쓰는 나를 이상하고 변태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사실 이렇게 글로 생각을 풀어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다. 그건 하나님께서 날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 그런 씨를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 것은, 돈, 명예, 권력, 성공 같은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심어놓으신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돈, 명예, 권력, 성공 같은 건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니까, 그딴거 모르겠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할 일이 있으실테니까, 그걸 달성하는 것만 생각할래. 하나님이 먹고 살게는 하실거야. 라고 믿고 돌진하며 사는 것. 그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 것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부모님을 섬기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아내, 남편이나 아이를 사랑하고 뒷받침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하나의 계획이나 씨앗만 심어놓으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찾고, 그것만 보고 그걸 위해 사는 것. 먹고 사는 건 하나님께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고 사는 것 말이다.

물론, 1-2개월은 커녕 24시간도 온전히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이성적으로 자신을 설득해야 하며, 모든 결정에 신중을 다하고 고민해야 한다. 또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필요 없는 거였나 보지]하고 치우면 된다. 뭐... 최소한 그러기 위해 순간, 순간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라고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머리를 준 것이다. 머리는 장식품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종교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 종교들은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던지, 신에게 뭔가를 바치면 이 땅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유한한 이 땅에 묶여있는 것이다. 또 어떤 종교들은 이번 생을 잘 살면 다음 생에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나? 근거가 어디있나? 없다! 또 어떤 종교들은 도를 닦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 본인이 초월하고 초탈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런가? 그렇다면 왜 수많은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원의 땅에서 발굴되었을까? 속세를 떠나서 도를 닦으라고? 번민에서 자유로우라고? 그렇게 살거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신이 있다면,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왜 굳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 내가 혼자 번민을 하지 않기 위해 세상을 버려야 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게 진리라면 인간은 왜 사회적 존재가 되었나? 외부의 위협이 있어서 그렇게 진화했다고? 그러면 기술의 발달로 외부의 위협이 없어지거나 덜해진 지난 100-200년 동안에는 인간이 사회성을 상실하도록 진화해야 맞지 않을까?

다른 종교들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너가 이걸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처럼 어느 설명 하나 모순적이지 않은 것들이 없다.

반면에 성경은 사후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우리가 지금 당장 볼 수 잇는 현실에 대해서, 현실에서의 인간에 대해서 사례를 통해서 설명하고, 그 사례들 사이에서 일하는 신,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해준다. 그리고 다른 성경은 하나님의 다른 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면서 궁극적으로는 [너희는 너희 노력으로 안돼]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 때문에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다 비슷하고 자신의 힘으로 욕구와 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에. 개신교는 이처럼 현실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조금 비현실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건 [성령님]의 존재다. 이 부분만 받아들인다면 사실 개신교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종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요지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 없으며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그러하기 위해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단 것이다. 내가 착한 일, 좋은 일을 내 힘으로 하려 하기 전에 우린 하나님 앞에 먼저 나가고, 충분히 채움을 받고, 그것이 넘침으로, 하나님께서 내 손을 움직이게 하심으로, 그 이끌리심을 받아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그게 지속가능하다. 내가 착한 일, 좋은 일 하는 것보다 말씀과 기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글은 사실 내가 지난 몇 개월간 힘들었던 이유를 돌아보며 정리한답시고 정리한 내용이다. 이걸 내 삶에 적용해서 고백하자면. 나는 일단 돈, 성공 이런거 상관 없이 닥치고 글 부터 쓰고, 글을 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그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비웃음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걸 쓸 기회와 마음을 주시면 난 그냥 일단 쓰면 되고 결과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만 좌우하실 수 있고, 내 삶은 그냥 그걸 쓰는 과정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전쟁이고, 나는 그냥 쓰면 되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과 환경은 주실 것이라 믿어야 한다. 그게, 믿음의 사람이 사는 방법이다.

그렇기 살지 못하고 결과를 놓고 두려워하며 수 개월을 보냈다. 이 글은 내가 그러했음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반성문이다. 입도 살았고, 말은 잘하지만, 그걸 살아내는 건 쉽지 않다. 그것도 아마 내 힘으로 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