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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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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철학의 한계와 성경의 인문학 철학이란 뭘까? 사람들은 '철학을 갖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지만 사실 철학은 읽으면 읽고, 파면 팔수록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얘기만 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건... 조금 과격하게 얘기하면 오늘날의 철학은 껍데기... 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철학을 의미하는 'philosophy'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이러한 지혜의 정의는 철학이란 결국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까지다. 철학은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찰 없이..
신학에 더이상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 로스쿨에 다닐 때 '신앙'이 아니라 '신학'서적들을 읽었다. 신앙서적들은 너무 기복신앙적이었고 가벼워서 나의 호기심들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세계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신학서적들을, 아예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잘 읽거나 큰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소위 말하는 '일반 성도'들이 잘 안 보는 책들 중에 관심이 있는 책들이 있다면 주로 성경을 더 들여다 보는 성서학쪽 책들인 듯하다. 신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신학은 굉장히 중요하고 신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고, 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계관과 가치관이, 신앙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신학은 유의미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학은 일정부분 너무 깊게만 파고 들어감으로써, 땅굴을 ..
내가 자랑할 것, 오직 한 가지 최근에 내게 이상형을 물어본 사람이 몇 있었다. 몇 년전부터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보다 상대가 나를 괜찮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해 주고도 만나보겠다고 하면 일단 만나보겠다고 한다. 내가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다. 이번에 이상형을 물어본 게 조금 독특했던 것은 얘기하다 보니 내가 신앙고백을 하고 있더라. 사실 몇 년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긴 하다. 누군가 내게 나의 가장 큰 장점, 자랑할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정말 진심으로, 거룩한 척 하려는 것도 겸손한 척 하려는 것도 아니고 딱 한 가지, 나이치고는 하나님 안에서 정말 오랫동안, 치열하고 고민하고 기도해서 내 나이대의 다른 사람보다 (성경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과 과학, 성경의 오류에 대하여 난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되는 구도가 유치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두 가지 모두 사실 [믿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하면 진화론자들은 화를 내겠지만, 프레임을 조금 바꿔서 생물학적인 특징들이 아닌 인간의 심리, 감정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왜 생겼는지를 물어보면... 진화론자들도 결국에는 그렇게 진화되었다는 믿음과 확신 외에 어떤 증거도 제시할 수 없고, 그 영역은 절대로 입증될 수 없는 영역이다. 성경에 나오는 창조론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우기려는 사람들은 더 한심하다. 우리가 생가하는 1년, 2년, 24시간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대에 쓰여진 창세기에서 어떻게 과학적인 얘기가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글을 쓴 사람들의 지식수준, 그 글들이 전해져 오는 과정들을 생각하면 그..
내가 개신교 신자로 남은 이유 성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이뤄진다. 그 안에 나온 하나님에 대해서,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문학적 성격을 갖는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그런 비판들이 모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런 비판들은 굉장히 깊은 고민과 치밀한 논리로 이뤄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반박하기가 힘든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비판들에 반박하려는 의견이라고 고작 제시되는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하나님은 틀리지 않으신다' 식의 맹목적인 주장들이라는 게 개인적으로는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비판들 이전에 [성경에 대한 해석과 비판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인간이다. 그런 비판들은 대부분이 인간이 생각하..
성경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 성경에 인문학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와 전제 없이 접근하면 우리는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다원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그건 '이 세상에 정답은 나도 모르겠어'라고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종교학 또는 다원론적 접근을 하는 종교인들은 그럴듯한 어려운 표현과 논리들로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걸 구구절절 풀어내는데... 그거, 그럴 필요 없다. 그냥 신은 보이지도, 잡하지도 않는 존재이니 모르겠다는 얘기다. 그런 얘기로 무슨 책을 몇 권씩 쓰는지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책들, 나도 읽어봤지만... 신앙 서적들만큼이나 쓸데 없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
광야와 우리의 실수, 욕망을 구분할 필요성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본인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게 하나님께서 내리는 시험이라거나 광야에서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표현이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표현이다. 광야에서의 시간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서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생이 앞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 외에는 붙들 게 없어진다. 우리는 그런 시간 안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하나님을 오롯이 신뢰하는 법을. 그게 광야의 시간이며 하나님의 시험이다. 그런 시간이 아닌 힘든 경험들은, 우리가 힘든 건 우리의 인간적인 실수로 인한 것이거나 우리가 여전히 세상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눈일 가리실 때 내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기 전에는 항상 잠시 멈춰서, 제 삶이 정말 그렇게 힘든 것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보다 세상에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멀리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서도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힘들다고 해도 되나...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상황 자체가 힘들다고는 못하겠지만, 내 마음만큼은 굉장히 힘들었다고는 말한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그렇게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내 눈을 가리우셨다. 내가 정말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더 힘들고 버티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눈을 가려주셨더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