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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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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신앙과 가정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아니 어쩌면 30대 중반까지도, SNS에 여자친구,연애, 소개팅 얘기하면서 징징대는 나이 많은 형들을 보면 짜증도 나고 한심해 보였었다. 그렇게 한심하고 추해 보였던 형들 나이 즈음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때 그들을 그렇게 봤던 경험이 있다보니 아무리 외롭고, 힘들고, 생각이 복잡해져도 그런 짓(?)은 하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쥐어 뜯으며 버텼다. 이 글을 포함해서 가끔씩 올리는 연애, 결혼에 대한 글들은 사실 그 형들보다는 덜 추해보이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 더해진 글들이나, 실상 그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것을 나도 안다. 오늘도 그걸 알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항상 조금은 시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법에 대한 흔한 착각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완전히 상반된 방향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혹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든걸 하셔'라고 생각하는, 착각하는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뭔가 마법처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많은 경우 하나님과는 완전 무관한 교회의 일인 경우가 많은)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일 모레가 기말고사인데 새벽기도와 금요철야, 주일 예배와 저녁예배까지 다 가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다. 두 번째는 '결국은 내가 노력해야 되는거야, 하나님..
사촌동생의 임신 소식을 들은 후, 어쩌면 삶의 이유에 대한 묵상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 또래 또는 나보다 어린 지인들의 결혼 및 출산 소식에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뭔가 내가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도 있지만, 20대에는 항상 30살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기에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걸 나는 갖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은 갖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가 얼마나 가정을 꾸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좋은 배우자와 좋은 아버지로 준비되는게 먼저라고 생각하니 그런 질투심들도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워낙 결혼이 늦어지면서 지인들이 대부분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또 적지 않은 이들이 아이까지 가지면서 그 부분에 대해 무덤덤해졌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미국에 사는, 재미교포인 사촌동생이, 나보다 10..
<코로나와 하나님> 매우,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코로나 사태가 델타플러스 변이까지 생기는 것을 보며 '이건 분명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셔서, 인간들을 혼내시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뭐 이것 때문이다. 저것 때문이다 하기 시작하면 사이비고 신비주의로 가겠지만, 이렇게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간들이 고립되고 인간들이 이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며 패닉에 패닉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이 땅에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바로 잡고 싶어하시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단 생각이 아무래도 든다. 그걸 해석하고 이렇게 하면 이럴 것이고 저렇게 하면 저럴 것이라고 하는 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사태를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도 기독교인의 ..
<한국교회가 성도들을 망치는 법-비전이라는 것에 대하여> 비전, 소명, 사명 이런 류의 말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도 그런 말을 자주, 쉽게, 마구 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류의 표현을 굳이 쓴다면 '소명'이란 표현을 쓴다. 굳이, 굳이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머리로, 고지론적으로 뭔가를 추구하는게 아니라 마음이 가는 곳을 향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가 성도들을 가장 망치는 가장 큰 방법은, 성경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 모세, 야곱, 이삭, 요셉, 다윗 등과 같은 인물들을 놓고 '그들과 같이 비전, 사명, 소명을 갖고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비전, 소명, 사명..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행복과 두려움에 대하여 앞의 글에서 두려움의 신앙은 유아적이고,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를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음... 그러기 위해 항상 노력했고,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그래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는 것 까지는 아는데, 내가 아직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내 자신에 대한 불신보다 작아서 노력을 충분히 하지는 못하고 출발선에서 발을 들였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신앙의 기반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란 것이다.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철이 없게도,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항상 하나님께 대화하듯 기도하며, 따지고 심지어 육두문자를 쓰면서 욕하..
두려움의 신앙, 그 유아성에 대하여 우리 아버지의 신앙은, 두려움 대한 신앙이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학창시절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께선 은사도 받으셨었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셨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두려워 제발 다시 가져가 달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정말 놀랍게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거둬가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께선 하나님을 '안' 떠나시는게 아니라 '못' 떠나고 계신다. 아버지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두려움의 하나님이다. 나도 나이가 어느 정도 지난 후에, 아버지께서 내가 본인 신앙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시며 해주신 말씀이다. 아버지만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신앙의 기반으로 갖고 살아간다. 요즘 시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랑, 자유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비춰지는 ..
기독교인의 회개에 대하여 어렸을 때 기도는 1. 회개부터 하고, 2. 감사한 다음에, 3. 본론을 하는 것이라 배웠다. 뭐... 딱 그렇게 배웠는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걸 말하기 전에 회개하고 감사부터 해야 하는거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기도에는 3번이 짧아지고 1번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요즘엔 심지어 회개만 하다 기도를 마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나의 욕심과 욕망에 가득 차서 벌벌 떨거나 실수했던 일들부터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내가 꽤나 괜찮은 애라는 생각에 1번이 힘들었고, 당연히 주어진 것들이고 나보다 많은 걸 가진 애들이 많았기에 2번도 쉽지 않았는데, 이젠 1번을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