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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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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감사 예전에는 공식처럼 했었다.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고, 그 다음엔 감사한 후에,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하기.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그런 순서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셨고, 범생이 스럽게도 시간과 장소를 잡고 기도할 때면 난 항상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쉬지 않았다. 말씀을 꾸준히 잘 읽을 때 더. 그나마 기도를 한참 하지 않았을 때는 큼지막한 잘못과 큼지막한 감사거리들이 생각나는데,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는 대체 하루 사이에 뭘 회개하고 뭘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회개부터 나온다.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예전에는 회개꺼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회개한다. 몸 관리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살찐 것도 죄..
기독교의 사랑이 세상과 구분되는 지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목사님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있는 이 말씀을 '그만큼 최대한 사랑하라고 노력하라는 것'으로 설교에서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내가 꽤나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 같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들 중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하는 말씀도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고, 우리가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지금도 유효한 율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게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내가 그게 안된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정죄할 필요는 없을 것..
죄에 대한 법적, 성경적 관점에 대한 생각- 동성애를 포함하여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누구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인]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목사님들도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성경의 죄인은 다른 것이라고만 설명해줬을 뿐이다. 우리나라 교회가, 목회자들이 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지만 그 중에 이 부분은 굉장히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의 의미가 명확히 서야, 신앙이 제대로 설 수 있고, 복음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겠나? 갑자기 교회에 왔더니 내가 죄인이라니... 법적으로 죄인은 풀어서 설명하자면 [국가에서 법으로 형사처벌을 하는 기준으로 세우는 것을 위반하는 행위]이고, 개인의 자유가 최우선시되는 근대헌법 하에서 누군가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최대한 보수적..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평생 새벽기도, 새벽예배를 꾸준히 간 적은 없다. 프로그램적으로, 교회에서 특새 같은 걸 할 때는 간 적이 있지만, 항상 졸았고, 그로 인해 종일 피곤했고, '이렇게 사는게 신앙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된다고...'라며 난 새벽예배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라고 말해왔다. 지금도 그것이 신앙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맞지 않는 것일 수 있고,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의 전통은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라는 설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새벽예배는 한국교회의 전통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정통을 구분하는 기준은 아니란 것이다. 그게 곧 새벽기도를 샤머니즘적인 행위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 정도는 정당화시..
목적, 결과, 하나님의 전쟁, 사랑-4편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고,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편 참조). 우리가 사랑해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들을 회복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테니까. 첫 글로 돌아가서, 우리가 큰 그림과 목표가 아니라 작은 것들에 집중하고,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목표를 잡고 노력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회복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물리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다.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기 전에 우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해줘야 한다..
목적, 결과, 하나님의 전쟁, 사랑-3편 거창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하나님 나라' 얘기를 했지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렵게 설명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난 박진영씨 처럼 복잡하고 현학적으로 하는 설명들, 특히 하나님이나 신학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저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숨겨 놓으셨을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이해할 능력이 있진 않을텐데?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삶의 무게로 인해 그럴 여유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무엇이든 최대한 그것을 공부하거나 고민하지 않은 사람도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
목적, 결과, 하나님의 전쟁, 사랑-2편 앞의 글에서 우리는 [과정]에 집중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썼고, 우리가 보통 목표로 하는 것은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린 그게 잘 되지 않는 존재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는 어떤 상태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도구가 주어져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어떤 수단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할 지를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그리고 우린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영향을 받으면서 태어났을 때 갖고 있는 것들이 망가지고, 묻히는 과정을 겪는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 안에 있는 오만함이 나를 잡아먹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된 그런 것들은 그대로 고착된다. 그건 우리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
목적, 결과, 하나님의 전쟁, 사랑-1편 평생 교회를 다녔다. 항상 내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도 그런 영향을 준 듯한 느낌이 있다. 찬양 중에 '하나님의 전쟁'이란 표현이 나오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에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다. 무엇이 하나님의 전쟁이고, 하나님의 전쟁이 있다면 무엇이 나의 전쟁일까? 지금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의 [결과]는 하나님의 전쟁이고, [과정]은 나의 전쟁이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목표, 도전,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 길을 열고 닫으면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우리는 그 문이 열리는데 필요한 최대..